[비즈한국] 최근 개봉한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이 팬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특히 소니 픽처스와의 판권 문제로 ‘어벤져스’와 함께할 수 없었던 스파이더맨의 과거를 멀티버스, 다중우주라는 매력적인 설정으로 재치 있게 풀어냈다.
*주의: 이 글은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홈’의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번 ‘노웨이홈’에서는 그간 출연한 스파이더맨을 모두 등장시켜 관객들에게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그런데 정말 영화처럼 또 다른 평행 세계, 다중 우주가 정말 존재할까? 멀티버스가 단순히 이론적 상상이 아니라 실제 관측적 증거로 입증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어쩌면 우리는 이미 멀티버스의 관측적 증거를 발견했을지 모른다. 영화 속 닥터 스트레인지가 만든 것 같은 시공간의 거대한 균열이 우리 우주에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그 균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일부 천문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균열이 멀티버스를 입증하는 최초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인류는 다중우주의 존재를 입증하는 관측적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우주 전역에는 아주 낮은 온도로 고르게 식은 미미한 노이즈가 퍼져 있다. 빅뱅 직후 아주 뜨거웠던 우주의 열기가 우주 팽창과 함께 고르게 식은 흔적, 우주 배경 복사다. 한 점에 모여 있던 우주가 통째로 고르게 팽창하며 식었기 때문에 우주 배경 복사는 온도가 거의 동일하다. 기껏해서 10만 분의 1 수준의 아주 미세한 온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2004년 천문학자들은 WMAP 우주 망원경을 통해서 예상치 못한 놀라운 모습을 관측했다. 남반구 하늘, 에리다누스자리 방향으로 무려 5도 정도 크기(보름달 10개 너비)에 걸쳐 주변에 비해 훨씬 더 낮은 온도로 우주 배경 복사가 차갑게 식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의 평균적인 우주 배경 복사에 비해 70~80μK 정도 온도가 더 낮은데, 이는 일반적인 우주 배경 복사의 온도 요동 스케일에 비해서 7~8배나 더 차갑다는 뜻이다. 이 수상한 영역에서 온도가 낮은 지점은 무려 150μK 더 낮았다. 이후 올라간 플랑크(Planck) 위성의 관측을 통해서도 이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게다가 빅뱅 직후 초기 우주에서 열과 빛이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수 있는 온도 요동의 최대 범위는 기껏해야 각도/너비가 1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한계의 다섯 배에 달하는 5도 너비의 지나치게 넓은 영역이 차갑게 식은 채 존재하는 것이다. 이 영역을 우주 배경 복사의 냉점(Cold Spot)이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가 관측하는 우주 배경 복사의 온도는 단순히 우주 자체의 배경 온도뿐 아니라 관측하는 방향에 놓여 있는 은하들의 분포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다. 은하가 많이 모여 있는 육중한 은하단이 놓인 방향을 바라보며 우주 배경의 온도를 재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은하단은 자신의 육중한 중력으로 주변 시공간을 움푹하게 파놓는다. 일종의 움푹하게 파인 중력 퍼텐셜 우물이다. 배경 우주에서 출발한 빛이 이 중력 퍼텐셜 우물을 통과하면 마치 웅덩이를 따라 굴러내려가며 점점 빨라지는 구슬처럼 에너지를 더 얻고 더 높은 온도의 뜨거운 빛으로 변한다. 그리고 다시 중력 퍼텐셜 우물의 경사를 기어올라 우물 바깥으로 벗어나면 다시 경사를 올라가는 구슬이 점점 느려지는 것처럼 에너지를 잃고 원래의 차가웠던 빛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주 자체가 팽창하면 아주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우주 자체가 팽창하면서 은하단에 의해 움푹하게 파여 있던 중력 퍼텐셜의 우물의 경사와 깊이도 계속 변한다. 우주가 덜 팽창했을 때에는 아직 중력 퍼텐셜 우물의 깊이가 깊고 경사가 가파르다. 그래서 중력 퍼텐셜 우물로 굴러내려간 빛은 에너지를 많이 얻고 더 높은 온도로 뜨거워진다.
그런데 중간에 우주가 팽창하면 중력 퍼텐셜 우물의 깊이가 얕아지고 경사가 완만해진다. 그러면 중력 퍼텐셜 우물 깊숙이 내려갔던 빛이 다시 나올 때에는 들어갔을 때 얻었던 에너지에 비해서 더 적은 에너지만 쓰고 우물을 벗어날 수 있다. 중력 퍼텐셜 우물 자체가 우주 팽창과 함께 늘어나다보니 우물에 들어갈 때 얻는 에너지와 나올 때 소모하는 에너지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빛은 은하단을 통과하기 전의 원래의 온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에 비해 좀 더 이득을 보며 에너지가 증가한, 살짝 더 온도가 높은 뜨거운 빛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효과를 ISW(Integrated Sachs-Wolfe) 효과라고 한다.
이 현상은 육중한 은하단과 반대로 주변에 비해 은하와 물질의 양이 훨씬 적고 텅 빈 공간, 보이드(Void)를 통과할 때도 벌어진다. 빛이 보이드를 통과할 때는 은하단 때와는 반대로 빛이 오히려 에너지의 손실을 보면서 더 낮은 온도로 식게 된다. 오랫동안 천문학자들은 우주 배경 복사 지도에서 발견된 미궁의 멍 자국, 냉점 역시 이렇게 거대하게 텅 비어 있는 아주 큰 슈퍼 보이드(Super void)가 있어서일 거라 추정했다.
천문학자들은 이 냉점 방향에서 은하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다양한 관측을 진행했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허블 우주 망원경, VLA 전파 망원경을 활용한 NVSS(NRAO VLA Sky Survey) 관측 프로젝트, 슬로안 전천 탐사(SDSS, Sloan Digital Sky Survey), 2마이크론 전천 탐사(2MASS, 2 Micron All-Sky Survey) 등 …. 하지만 어떤 관측에서도 슈퍼 보이드를 확인할 수 없었다.
2014년 이후 조금씩 슈퍼 보이드의 존재 가능성이 새롭게 확인되기 시작했다. 천문학자들은 하와이의 Pan-STARRS1 망원경과 NASA의 WISE(Wide Field Survey Explorer) 관측을 활용해 우주 배경 복사의 냉점 방향의 우주를 다시 면밀하게 관측했다. 그 결과 지구에서 고작(!) 30억 광년 거리에서 은하들의 분포가 확연하게 적어 보이는 보이드를 새롭게 발견했다. 기존 연구들은 100억 광년 이상의 먼 우주에만 주목한 탓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보이드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새로 발견한 보이드로는 실제 관측되는 냉점의 아주 낮은 온도를 모두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보이드는 우주 배경 복사의 빛을 최대 겨우 20μK 정도만 더 낮출 수 있을 뿐이라 50~60μK 온도 차이가 남아 있다.
2017년 다시 한번 냉점 방향의 하늘만 집중적으로 관측하는 2CSz(2dF-VST ATLAS Cold Spot Redshift) 탐사가 진행되었다. 이번 관측에는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즈에 위치한 앵글로-오스트레일리안 망원경(AAT, Anglo-Australian Telescope)을 활용했다. 끈질긴 탐색 끝에 냉점 방향에서 30억 광년 너머 서로 다른 거리에 분포하는 또 다른 텅 빈 보이드 세 곳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세 개의 보이드와 앞서 발견된 가장 가까운 보이드, 총 네 개의 보이드를 모두 고려하더라도 우주 배경 복사의 온도를 최대 30μK 더 낮출 수 있다. 여전히 냉점의 지나치게 낮은 온도가 설명이 안 된다.
2021년에도 천문학자들은 우주 전역의 은하 분포 지도를 관측하는 암흑 에너지 탐사(DES, Dark Energy Survey)를 통해 다시 한번 에리다누스자리 방향의 냉점 주변을 뒤졌다. 이번 연구에서는 중력 렌즈 효과를 활용해 더 정밀하게 주변 영역에 질량이 어떻게 분포하는지를 파악했다. 그러자 냉점이 놓인 방향의 우주에서는 다른 주변 지역에 비해 약 20퍼센트 물질의 밀도가 낮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이번 관측에서 중력 렌즈를 통해 파악한 우주 사방의 질량 밀도 분포와 우주 배경 복사에서 보이는 냉점의 분포를 비교하면, 정확하게 질량 밀도가 낮은 지역에서 냉점이 관측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에리다누스자리 방향의 하늘, 냉점이 보이는 자리에 은하를 비롯한 질량이 아주 적게 분포하며 텅 비어 있는 ‘에리다누스 슈퍼 보이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주 배경 복사의 냉점은 여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슈퍼 보이드에 의한 ISW 효과를 고려하더라도 우주 배경 복사 냉점의 지나치게 낮은 온도의 겨우 20퍼센트만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우연히도 초기 우주에 하필이면 냉점이 자리한 방향에서 처음부터 온도가 지나치게 낮은 상태로 출발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하지만 우주론적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단순히 우연에 의해 이런 지나치게 온도가 낮은 지점이 크게 생길 확률은 2퍼센트뿐이다. 물론 아주 희박한 확률은 아니지만, 많은 천문학자들이 아직도 냉점을 설명할 더 명확한 원인을 찾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일부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우주 배경 복사의 냉점에 대해 한 가지 흥미로운 가설이 제기됐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바깥의 또 다른 우주가 충돌하면서 발생한 일종의 멍 자국일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 우주의 급격한 팽창을 이야기하는 인플레이션 이론은 우리 우주 너머 시공간 자체가 끝없이 급팽창을 계속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 너머 또 다른 곳곳에서 수많은 우주의 탄생과 소멸이 이어지고 있을 수 있다. 말 그대로 무한하게 많은 비눗방울로 가득찬 거대한 욕조처럼 우리 우주는 수많은 우주로 가득찬 거품 우주라고 볼 수 있다.
간단한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이런 각각의 거품 우주가 허공을 떠도는 비눗방울들처럼 서로 부딪치며 상호작용을 할 가능성이 있다. 두 우주가 부딪치면서 충돌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입자들이 쌍으로 생성되어 퍼져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는 양자 수준에서 아주 미미한 파문을 일으키며 둥글게 퍼지는 흔적을 남긴다. 게다가 놀랍게도 우주 배경 복사의 온도를 관측하면 동심원 형태로 둥글게 퍼져나간 충돌의 여운을 확인할 수 있다고 추정한다!
과학은 인간의 세계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며 발전해왔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고, 그 후에는 태양이 은하계의 중심이길 기대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라 생각했지만 그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이렇게 계속 유일할 줄 알았던 것이 그저 수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온 ‘코페르니쿠스 원리’를 경험한 덕분에 이제는 우리 우주가 유일하지 않은, 수많은 다중우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의심 역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상이 실제 과학의 영역에서 다뤄지려면 입증 또는 반박이 가능한 방법론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거론되고 있는 우주 배경 복사의 냉점에 관한 새로운 가능성은 아주 흥미롭다. 그저 막연한 SF의 상상이라 생각했던 다중우주의 존재를 이론이 아닌 실제 관측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관측적 방법론을 제시한 셈이기 때문이다. 다중우주론이 칠판 속 이론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 관측으로 입증/반박이 가능한 실험 과학의 영역으로 옮겨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스파이더맨 영화를 보고 난 뒤 한 가지 짓궂은 상상을 해보았다. 어쩌면 우리 우주 어딘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행성에서 이름 모를 소서러 수프림이 위험한 마법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영화에서처럼 다른 다중우주와 우리 우주 사이에 균열이 벌어지면서 그 흔적이 우주 배경 복사의 냉점으로 관측되는 것은 아닐까.
영화 마지막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는 뉴욕 자유의여신상이 들고 있는 횃불 위에서 스파이더맨에 대한 모든 기억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마지막 마법을 시전한다. 어쩌면 그 마법은 스크린이라는 벽 너머 우리가 앉아 있는 바로 이 우주까지 대상으로 했을지 모른다. 그 순간부터 기존 스파이더맨의 설정과 기억은 모두 잊고, 앞으로 전혀 다른 설정으로 새롭게 펼쳐나갈 스파이더맨을 좋게 봐달라는.
인류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 없이 과학의 힘을 통해 다중우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중우주는 그저 ‘코페르니쿠스 원리’가 지나치게 반영된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다중우주를 확인할 수 없는 운명은 아닐까? 다중우주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우주에 살고 있을 존재들이 부럽기만 하다.
참고
https://academic.oup.com/mnras/article/470/2/2328/3752440
https://space.mit.edu/home/tegmark/PDF/multiverse_sciam.pdf
https://iopscience.iop.org/article/10.1086/522222
https://academic.oup.com/mnras/article/403/1/2/1014936
https://journals.aps.org/prd/abstract/10.1103/PhysRevD.90.103510
https://ui.adsabs.harvard.edu/abs/2014arXiv1406.3622S/abstract
https://academic.oup.com/mnras/article/470/2/2328/3752440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50-019-0930-9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550321316300037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50-019-0906-9
https://academic.oup.com/mnras/article/470/2/2328/3752440?login=true
https://journals.aps.org/prl/abstract/10.1103/PhysRevLett.107.071301
https://academic.oup.com/mnras/article-abstract/510/1/216/6468992?redirectedFrom=fulltext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은하진화연구센터 및 근우주론연구실에서 은하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진화를 연구하며,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고 있다. ‘썸 타는 천문대’, ‘하루 종일 우주 생각’, ‘별, 빛의 과학’ 등의 책을 썼다.
지웅배 과학칼럼니스트
galaxy.wb.zi@gmail.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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