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2020년 ‘한겨레’는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 연구팀과 공동으로 한국 대표 스타트업 80곳의 창업자 93명의 학력과 경력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49.5%(46명)가 서울대·연세대·고려대·포항공대·카이스트 등 국내 5개 대학과 미국 상위 30위권 대학 출신으로 집계됐다.
‘대학 중퇴’ 후 집 주차장에서 친구들과 무엇을 ‘뚝딱’ 만들어냈다는 실리콘밸리의 흔한 창업 성공 신화와는 대비되는 대목이다. 물론 적어도 ‘주차장이 있는 집’에 살아야 성공한 창업가가 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미국에도 있다. 그렇다면 유럽의 스타트업은 어떨까. 그들에게도 우리만큼 학벌이 중요할까?
#학벌보다는 네트워킹
일단 유럽에서는 우리말 ‘학벌’과 문화적 맥락이 일치하는 말을 찾기 어렵다. 한국처럼 대학에 서열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대학 출신은 무조건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공식’도 없다. 유럽 대학에도 랭킹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대학 교육의 질, 연구 시설 같은 인프라 등 연구하기에 얼마나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느냐로 평가한다.
특정 대학교보다는 ‘대학 수준의 양질 교육’이 스타트업 생태계에 중요하다. 이는 많은 연구에서도 증명된다. 유럽의 창업자들은 “스타트업은 대학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잘 훈련된 인적 자본을 쉽게 찾을 수 있고, 혁신적인 솔루션을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다. 또 대학이 있는 도시가 스타트업 생태계에 더 개방적이다”라고 말한다(유럽 스타트업 모니터 2019).
지금까지 다양한 스타트업 종사자들을 만나고 관찰한 결과, 유럽에서는 출신 학교보다는 ‘어느 기업에서 어떤 실무를 경험했는지’가 더 중요한 요소임을 발견했다. 출신 학교는 학교 자체보다는 다양한 선후배 동기들과의 네트워킹 측면에서 관심을 갖는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비즈니스계의 SNS 링크드인이다. 링크드인은 비즈니스를 위해 자신이 원하는 만큼 학력과 경력을 노출할 수 있다. 구인·구직에 활용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학력와 경력을 공개하고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며 자신의 스킬을 ‘세일즈’한다. 많은 스타트업 창업자들도 자신에게 유리한 만큼 프로필을 공개한다.
특히 창업자들의 경우 일반 학위보다 실무적인 것을 배우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MBA 과정을 거친 경우가 많다. 그래서 MBA는 유럽 사람들에게도 관심사다. ‘그냥 이직하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MBA에서 경험을 좀 더 쌓는 게 좋을까요?’와 같은 질문을 온라인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만큼 MBA에서의 배움과 인맥이 창업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창업자들의 실제 학력은?
그렇다면 유럽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실제 학력은 어느 정도일까. ‘2018년 EU 스타트업 모니터’에 따르면 창업자의 82.8%는 남성이고, 84.8%는 대학 학위가 있다. 창업 시 평균 나이는 35세였다.
MBA 과정을 거친 창업자도 많다. 유럽에서 최근 각광받고 있는 ‘10분 생필품 배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링크(Flink), 밀키트 회사 헬로프레시(HelloFresh), 패션 이커머스 잘란도(Zalando) 창업자는 독일 WHU(Otto Beisheim School of Management)의 MBA 과정을 이수했다. 셋 다 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유니콘이 됐다.
유럽에서 유니콘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는 케임브리지대학이다.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의 유니콘은 9개, 스타트업 창업자는 374명이다. 2015년 런던에서 창업한 에너지 스타트업 옥토퍼스 에너지(Octopus Energy) CEO 그렉 잭슨(Greg Jackson), 영국의 VR 스타트업 임프로버블(Improbable) CEO 허만 나룰라(Herman Narula), 베를린의 헬스테크 스타트업 아다 헬스(Ada Health) CEO 다니엘 나트라트(Daniel Nathrath)가 케임브리지 출신이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2021년 유럽 최고의 MBA 과정으로 꼽은 프랑스 인시아드(Insead)는 유니콘 기업 9개와 스타트업 창업자 204명을 배출했다. 국제 송금 플랫폼 와이즈(Wise) 창업자 타벳 힌리커스(Taavet Hinrikus), 베를린 물류 스타트업 센더(Sennder) 창업자 데이비드 노타커(David Nothacker), 딜룸(Dealroom)에서 앞으로 유망한 스타트업으로 꼽힌 핀테크 커브(Curve)의 CEO 샤차르 비알릭(Shachar Bialick), 전동 스쿠터 스타트업 도트(Dott)의 창업자이자 COO 막심 로매인(Maxim Romain)이 인시아드에서 공부했다.
기술 기반 스타트업을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은 독일의 뮌헨공과대학(TUM)이다. 7년 연속 독일 최고 대학으로 선정된 명문으로 8개의 유니콘 기업과 209명의 스타트업 창업자를 배출했다. 뮌헨공과대학은 공립대학이기 때문에 등록금이 없다. 데이터 SaaS 스타트업 셀로니스(Celonis), 항공택시 스타트업 릴리움(Lilium), 네오뱅크 몬조(Monzo)의 창업자가 뮌헨공대 출신이다.
그 밖에 런던정경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뮌헨 루트비히막시밀리안대학(LMU), 스위스 세인트갈렌대학(University of St. Gallen), 영국 옥스포드대학교, 스웨덴 왕립공과대학(KTH Royal Institute of Technology), 런던비즈니스스쿨(London Business School), 파리 HEC(HEC Paris),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가 유니콘을 가장 많이 배출한 유럽 교육기관으로 차례로 이름을 올렸다.
앞에서 학벌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것과 달리, 많은 창업자가 유럽 MBA 또는 대학 상위 랭킹 학교 출신이다. 특히 유니콘으로 멋지게 성장한 이들의 이야기에는 심심찮게 세계 명문 대학 이름이 오르내린다. 그러나 오해는 금물. 이들이 성공한 것은 ‘좋은 대학 출신’이어서가 아니다. 대학을 중퇴했다고 해서 모두가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가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유럽 명문 대학의 좋은 교육 환경에서 공부하면 이점이 있을 것이다. 유럽 MBA는 적게는 1년에 4만 달러(4000만 원), 많게는 10만 달러(1억 원)가 넘는 수업료를 내야 한다. 그만한 자본을 투자했는데 뭐라도 얻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스타트업을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정답은 아니다. 한국과 유럽 스타트업의 IR 자료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금방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스타트업들은 하나같이 회사 IR 자료에 창업자의 출신 학교를 적는다. ‘스카이(SKY)’나 카이스트 같은 명문 대학 출신인 경우에는 더욱 도드라진다. 만약 유럽에서 그런 자료로 투자설명회를 한다면 모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PPT 한 장에 5분은 공들여 읽어야 할 것 같은 텍스트로 가득 찬 IR 자료라면 더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서사다. 어떤 학교에서 무엇을 공부했건, 어떤 회사에서 무슨 일을 했건, 그건 자기 서사를 끌고 나가는 보조적인 수단이다. 혁신을 추구하는 스타트업의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세상에 내놓을 때는 창업자가 왜 어떻게 그 아이디어를 생각했는지 ‘핵심’에 집중해야 한다. 본질이 탄탄하게 스토리텔링되어야 투자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스타트업이 되려면 말이다.
필자 이은서는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향수병에 못 이겨 다시 베를린에 와 살고 있다. 다양한 스타트업과 함께 일하며, 독일 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 한국 시장을 공략하려는 독일 기업을 안내하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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