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유럽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개의 스타트업들이 창업한다. 기업 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스타트업들도 수없이 생겨나고, 더 빠른 속도로 ‘유니콘’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생활용품 10분 배송’ 사업에 뛰어든 베를린의 고릴라스(Gorillas)가 서비스 개시 9개월 만에 유니콘 기업으로 평가받고, 몇 달 후 경쟁사 플링크(Flink)가 서비스 개시 7개월 만에 유니콘 기업이 되면서 많은 스타트업이 유니콘 전쟁 속에서 선두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다.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에서 2019년에만 유니콘이 14개 탄생했다. 베를린의 네오뱅크 N26, 파리 근교에서 시작한 진료 예약 플랫폼 독토립(Doctolib),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Vilnius)에서 시작한 온라인 의료 중고 마켓 빈티트(Vinted)가 대표적인 유니콘이다. 이렇게 빠른 성장에도 불구하고 후기 단계에서 유럽 스타트업의 성장은 미국 등 타 생태계에 비해 더딘 편이다. 시리즈 C 자금 조달 단계에 도달하거나 상장한 스타트업들이 여전히 적은 편이며, 인구와 GDP를 고려했을 때 미국보다 40% 정도 스타트업 수가 적다. 그러나 이것이 유럽 스타트업 생태계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파산율을 기준으로 하면 유럽이 미국보다 낮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스타트업 자체의 혁신 아이디어나 기술만이 창업의 동력이 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스타트업이 만들어지고 하루에도 몇 개씩 문을 닫으면서, 작은 아이디어들이 쉽게 실현되고 유지되고 성장하도록 돕는 스타트업들이 생겼다. 오늘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창업가들이 편리하게 스타트업을 운영할 수 있도록 돕는 스타트업을 조명한다.
#법인 설립을 원스톱으로, 피르마 데에
독일은 관료조직(bureaucracy)의 나라로 악명 높다. 한국보다 유럽이 전반적으로 디지털화가 느리고 서비스 품질이 낮지만, 그 중에서도 독일은 업무처리가 가장 느린 국가로 손꼽힌다. 기본적으로 ‘독일어’라는 언어의 장벽이 높을 뿐만 아니라 행정이나 은행 업무를 위해 직접 방문해서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방문을 위한 예약 잡기, 서류 준비 등에도 노고가 많이 들어간다. 한국에서라면 뚝딱 처리할 일이 독일에서는 몇 개월이나 걸려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독일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이러한 비용을 감안해야 한다는 조언이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독일인들도 이런 환경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도 나온다.
피르마 데에(firma.de)는 2012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설립된 스타트업이다.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등의 법인 설립을 웹에서 간단하게 진행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자본금을 납입할 계좌 개설, 상업등기부 등록, 사업자 등록, 공증인 및 변호사와의 법적 절차 진행 등을 ‘피르마 데에’ 패키지 상품을 이용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다.
피르마 데에 설립자들은 스타트업 창업 경험이 있다. 스타트업을 운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설립하는 일이었기에 이에 착안했다. 은행 및 법률 전문가들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법인 설립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든 행정 절차를 원스톱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패키지를 구성했다. 설립 2년 만인 2014년에 천 번째 회사 설립을 도왔고, 2017년에는 리걸테크(Legal Tech) 스타트업 리걸베이스 데에(legalbase.de)를 인수해 온라인 법률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고 있다. 2019년부터는 독일 상공회의소(AHK) 해외 지사 10곳, 도이체텔레콤, AWS와의 협력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회사법 전문 변호사 및 세무사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핫라인 상담, 기본법률·세무 상담 구독 등을 제공하며, 기본 무역을 위한 통관번호(EORI Number) 발급, 상표권 등록 등의 서비스도 제공한다. 현재는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도 지사를 두어 활동반경을 넓히고 있다.
#인사관리 소프트웨어 개발, 페르조니오
페르조니오(Personio)는 2015년 뮌헨에서 설립된 HR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스타트업이다. 현재 직원은 약 1000명이며 뮌헨뿐만 아니라 마드리드, 런던, 더블린, 암스테르담에 지사를 두어 전 유럽을 커버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설립 6년 만인 지난 10월에 시리즈 E 자금 조달 라운드에서 2억 7000만 달러를 유치했으며, 기업가치가 60억 달러 이상이 되면서 더욱 관심을 받고 있다. 시리즈 E는 쿠팡, 고릴라스 등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진 그린오크스 캐피탈(Greenoaks Capital Partners)이 주도했다. 설립자이자 CEO인 한노 레너(Hanno Renner)는 31세의 나이에 페르조니오를 성공으로 이끈 장본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페르조니오는 중소기업들이 인력 부족으로 인사관리(HR)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에 착안해 HR 프로세스 관리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크게 채용, 인사 관리, 급여 지급 등 기본적인 HR에 필요한 프로세스와 함께 직원 피드백 관리, 전자 서명 및 문서 같은 템플릿 등 회사 운영에 필요한 기본적이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채용 부문에서는 채용공고 및 지원자 관리 솔루션, 인사 관리에서는 온보딩, 디지털 인사관리 시스템 및 근태, 휴가 관리 등을 제공하며, 급여 지급은 기존 온라인 회계 시스템 다테브(DATEV)와 연동해 손쉽게 관리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기존에는 중소기업이 HR만을 위해 평균 40개 이상의 툴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페르조니아는 다양한 툴의 장점을 결합한 HR 전문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슬랙, 마이크로소프트 팀즈(Teams) 등 기존 협업 툴과도 연동해 최적의 업무 흐름을 제공하려고 한다. 현재 5000개 이상의 회사를 고객사로 두고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사무 집기·물품·전자제품 구독 서비스, 렌디스
렌디스(Lendis)는 ‘사무실과 홈 오피스를 위한 넷플릭스 구독’을 서비스 모토로 가진 스타트업이다. 2018년 베를린에서 설립됐으며 프롭테크와 핀테크 전문 투자사인 HV 벤처스, DN 캐피털, 피쿠스 캐피털(Picus Capital) 등의 투자를 받아 성장하고 있다. 코로나19로 홈오피스가 증가함에 따라 홈오피스용 가구 및 전자제품 수요가 늘어나면서 더 빠르게 성장했다.
공동 창업자인 스타브로스 파파도포로스(Stavros Papadopoulos)와 율리우스 볼츠(Julius Bolz)는 경영 컨설팅회사인 보스톤 컨설팅 그룹(BCG)에서 만났다. 독일의 중견기업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면서 많은 회사가 장비를 구매하고 관리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시장의 문제점을 바탕으로 2018년 여름에 사무용 가구·장비 임대의 수요에 관해 테스트를 시작했다. 테스트를 통해 장비 구매뿐만 아니라 관리에 대한 수요도 크다는 것을 발견하고 본격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발전시켰다.
새로운 직원이 한 명 채용되면 의자, 책상, 컴퓨터, 휴대폰 등을 비롯한 각종 업무 용품이 필요하다. 매번 새롭게 용품을 구입하고 유지·관리하는 데 인력을 쓸 필요 없이, 렌디스를 통하면 배송에서 조립, 수리, 보험 등의 서비스를 원스톱으로 이용할 수 있다. 매월 사용료를 내는 ‘구독모델’이기 때문에 유동성이 많은 스타트업들에 꽤 흥미로운 서비스다. 이미 루프트한자, 폭스바겐, 토요타, 삼성 등 대기업 등을 고객으로 두고 있으며 N26, 잘란도, 딜리버리히어로, 인팜, 플링크 등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신생 기업들도 렌디스의 고객이다.
매달 해지가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고, 온라인을 통해 모든 집기를 관리할 수 있어 회사의 관리 리소스를 줄일 수 있다. 특히 구독료가 세금 공제가 되기 때문에 비용 측면에서도 장점이 있다.
코로나 시기에 유럽 회사는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들에게 직장과 동일한 업무 환경을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했으므로 렌디스의 서비스가 더욱 인기를 얻었다. 2019년 대비 2020년 매출이 3배가량 성장했다. 현재 18개국 출신 1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며 800곳의 고객사를 보유했다.
혁신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한 창업자에게는 사업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시장에 내놓기 위해 필요한 사업 외적인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무실을 구하기 어려워서, 사람을 뽑기 어려워서, 법률문제와 세금·회계가 복잡해서, 창업자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긴 시간과 큰 비용을 소모한다. 하지만 혁신의 아이디어는 늘 어려움 속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그 어려움에 주목하는 스타트업들은 반드시 있다.
필자 이은서는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향수병에 못 이겨 다시 베를린에 와 살고 있다. 다양한 스타트업과 함께 일하며, 독일 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 한국 시장을 공략하려는 독일 기업을 안내하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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