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망했다. 또 OTT 서비스에 가입했다. 비루한 잔고와 소박한 수입을 생각하면 과감하게 외면해야 하는 건데, 이건 제목과 포스터를 볼 때부터 보지 않고는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이말년 작가의 웹툰 ‘이말년씨리즈’의 ‘불타는 버스’ 편에 삽입된 ‘뜬금포’ 대사를 제목으로 차용한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요즘 보기 드문 블랙코미디 드라마. 현실 정치판과 소름 돋는 싱크로율을 보이는 웨이브(wave) 오리지널 드라마로, 나를 웨이브로 덜컥 끌어당겼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수명이 1년 남짓 남은 정권에서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공석이 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이자 ‘80년대 김연아’로 불리는 셀럽이었던 이정은(김성령)이 임명되어 벌어지는 이야기. 소위 ‘땜빵용’ 장관을 추천하는 청와대 참모진들의 모습부터 흥미진진한데, 장관이 되는 이정은의 이력부터 흥미를 돋운다. 올림픽 사격 금메달 3관왕 출신 셀럽인 그는 야당 국회의원 차정원(배해선)에 의해 국회의원으로 지내다 임기를 마치고 더 이상 관심을 못 받는 인물. 보수정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으나 늦은 나이에 만나 결혼한 남편은 진보 성향의 정치평론가 김성남(백현진)이요, 여당인 현 정권에 의해 문체부 장관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다. 이정은 장관의 이력부터 현실의 누구누구누구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각설하고, 수명이 정해져 있는 땜빵용 장관이지만 이정은은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의 염원이자 여당의 공약이기도 했던 ‘체수처’ 출범에 온 힘을 기울인다. 체수처가 뭐냐고?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친 각종 폭력 및 부정행위를 바로잡기 위한 체육문화인 비리수사처’다. 길어서 그냥 ‘체수처’인데, 이 드라마의 사건은 ‘체수처 설립 준비단 설치를 위한 자문위원회 출범식’이 열리는 날 시작된다. 거창한 명칭의 출범식이지만, 체육계 폭력 생존자로 이 출범식에 지지 성명을 낼 예정이던 우가은 선수(안다정)는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려는 문체부 정책보좌관 서도원(양현민)과 마찰을 빚고, 급하게 자문위원장을 부탁했던 차정원 의원은 일부러 이정은에게 ‘빅엿’을 날리고자 출범식에 불참한다. 준비된 자문위원도, 지지를 보낼 선수도 없어진 마당에 기자들 앞에 선 이정은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며 전세를 역전, 장안의 화제와 엄청난 지지는 물론 미미한 숫자이긴 하지만 ‘대권의 잠룡’으로 급부상한다! 그러나 의문의 대통령 호출로 청와대로 가는 도중 남편 김성남 작가의 추악한 실체를 밝힌다는 의문의 문자와 함께 남편의 납치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드라마 속에서 디지털소통팀장은 ‘이모저모’ ‘요절복통’이란 식상한 단어는 절대 쓰지 말랬지만,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이모저모 뜯어보고 곱씹을 곳이 많고, 곳곳에 포진한 잔잔바리 웃음은 물론 요절복통 포인트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정치는 물론 종교, 언론, SNS, 문화예술체육계에 만연한 폭력과 성폭력, 연인 사이의 ‘도촬’과 해킹, 연예계 부조리 등 한국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건드리고, ‘니 편 내 편’ 가릴 것 없이 돌려 까는 현실 풍자가 일품. 밋밋하지 않고 다층적인 캐릭터들의 매력, 캐릭터들을 100% 충만하게 살려내는 배우들의 호연, ‘말맛’ 돋보이는 유쾌하고 센스 넘치는 대사가 삼박자를 이루면서, 계속 킥킥거리며 웃는 와중 ‘저런 일이 있었지’ ‘저 사건은 그 사건 같은데 어떻게 되었더라’ 생각하게 만드는 게 이 드라마의 묘미다.
‘女-女’ 케미가 트렌드인 최근 대중문화의 흐름에 어울리게,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에도 이정은 장관 역의 김성령과 야당 중진 의원 차정원 역의 배해선의 조화가 눈길을 끈다. 그간 정치드라마에서 여성 정치인에게 부여됐던 비슷비슷한 색깔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매력적. 지나치게 강직돼 있는 명예남성 느낌도 아니요, 여성이란 성별을 도드라지게 표출시키는 느낌도 아니다. 코너에 몰린 순간 승부수를 낼 줄 아는 이정은 장관이나 상황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스탠스를 바꾸는 차정원 의원의 모습은 진중한 분위기의 정치 드라마에서도 찾기 힘든 것들이므로.
여기에 ‘늘공(늘상 공무원)’과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어우러지는 문체부의 현실에서 직장인의 희로애락과 비애도 십분 느낄 수 있다. 드라마 후반부 커다란 사건에 휘말리는 문체부 기획조정실장 최수종(정승길)이나 문체부 최연소 대변인 신원희(이채은), 그리고 ‘어공’이지만 ‘늘공’ 못지않게 물심양면 전천후로 활약하는 이정은 장관의 수행비서 김수진(이학주)의 활약이 직장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거든. 차정원 의원이나 청와대의 전략가 정무수석 엄대협(허정도), 차관을 꿈꾸는 문체부 정책보좌관 서도원처럼 빌런 포지션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물들도 맥락 없는 빌런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공감이 간다. 아, 진짜 현실감 쩌는 연기를 선보인 ‘아가리 파이터’ 김성남을 맡은 백현진도 놓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영화 ‘은하해방전선’, 드라마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출출한 여자’ ‘게임회사 여직원들’ 등을 연출하며 독립영화와 웹드라마계에서 일찍이 재기발랄함을 드러냈던 윤성호 감독의 장기가 돋보이는 리얼한 현실 풍자극이다. 정치물과 블랙코디미를 좋아한다면 미드 ‘웨스트윙’에 웃음 한 바가지를 들이부은 느낌의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를 좋아할 것이다. 이정은의 행보와 남편 김성남과의 관계, 차정원 의원과 김수진 사이 남아 있는 감정 등 더 진전시켜야 할 떡밥들이 많다. 그러니, 이렇게 된 이상 시즌2로 가자. 그때까지 웨이브를 끊지 않을 테니.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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