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1952년 한 실험실에 수상한 연금술이 시도되었다. 돌멩이를 황금으로 만드는 것보다 더 놀라운 시도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이 대단한 실험을 시도한 연금술사는 화학자 스탠리 밀러였다.
밀러는 초기의 지구 환경에서 유기물이 자연적으로 합성되는 과정을 재현하고자 했다. 우선 둥근 플라스크 안에 메테인, 암모니아, 수소와 같은 기체를 담았다. 이 성분은 과거 초기 지구의 대기를 채우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런 뒤 플라스크 안에 물을 넣고 가열했다. 가열된 수증기와 함께 올라간 기체 성분들은 유리관으로 연결된 다음 플라스크로 이동한다. 이 두 번째 플라스크 안에 전극을 넣어 전기 스파크를 일으켰다. 초기 지구의 하늘에서 빈번하게 내리쳤을 번개를 재현했다. 다시 바로 아래에 기체를 냉각하는 냉각기를 설치해서 유리관을 따라 첫 번째 물이 담긴 플라스크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런 식으로 실험 장치에 담긴 기체를 며칠 동안 계속 순환시켰다.
하루가 지나면서 서서히 실험 장치에 담긴 물의 색깔이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일주일 정도 지나자 선명한 붉은 색으로 변했다. 놀랍게도 붉게 변한 용액 속에서 처음에 넣지 않았던 새로운 성분들이 검출되었다. 그 중에는 생명을 구성하는 주요 성분인 아미노산 여러 종류도 있었다. 이렇게 밀러는 최초로 실험실에서 유기물을 합성해낸 생명의 연금술사가 되었다. 이후 그의 실험은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재현되었고 초기 지구 환경에서 유기물의 합성이 어떻게 진행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 중요한 실험적 증거가 되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실험 결과가 발표되고 7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이 실험 결과에 대한 충격적인 분석이 ‘네이처’에 발표되었다. 놀랍게도 70년 동안 모두가 간과한 중요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실험에 사용된 플라스크의 유리 성분이 실험 결과를 오염시켰을 가능성이 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이 오염 덕분에 오히려 실험은 의도치 않게 더 제대로 진행된 꼴이 되어버렸다! 대체 밀러의 실험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리고 오염이 어떻게 더 긍정적인 결과가 될 수 있을까?
밀러의 유명한 실험에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중요한 오염이 숨어 있었다.
실험실에서는 보로실리케이트(borosilicate) 유리 용기를 많이 사용한다. 이 성분은 붕산와 규산 이온이 들어간 성분으로 높은 온도에서도 깨지지 않고 잘 버티기 때문에 주방용품으로도 많이 쓰인다. 그런데 문제는 실험이 진행되면서 플라스크에 담긴 용액이 알칼리성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알칼리성 용액에 의해 보로실리케이트 유리에서 규산염 성분이 느리게 빠져나갈 수 있다! 결국 의도치 않게 실험에 쓰인 유리 용기 자체가 실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유리 용기에 의한 오염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이번 연구에서 연구진은 세 가지 상황을 놓고 실험을 똑같이 진행했다. 첫 번째는 밀러가 했던 것과 똑같이 단순히 보로실리케이트 유리 용기로 실험을 했다. 두 번째는 규산염이 녹아서 빠져나올 염려가 없는 테플론(Teflon)으로 코팅된 용기를 사용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테플론 용기로 실험을 하되 안에 담긴 물에 작은 보로실리케이트 유리 조각을 넣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규산염이 녹아서 빠져나올 염려가 거의 없는 테플론 용기만 사용한 두 번째 실험에서는 실험 결과 생성되는 유기물의 양이 확연하게 감소했다. 반면 보로실리케이트 유리 용기를 그대로 사용한 첫 번째 경우와 테플론 용기를 쓰면서 안에 보로실리케이트 조각을 함께 넣어서 진행한 세 번째 경우는 모두 훨씬 더 많은 유기물을 만들어냈다. 이는 분명 보로실리케이트라는 유리 플라스크 성분 자체가 실험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유리 플라스크에서 규산염이 찔끔찔끔 빠져나오면서 유리 플라스크 표면에는 규산염이 빠져나온 빈 자리가 생긴다. 이러한 화학적 부식으로 인한 유리 플라스크 표면에 작은 틈이 생긴다. 이런 작은 틈은 더 오랜 시간 분자들이 그 안에 담겨 머무르면서 더 쉽게 화학 결합을 할 수 있는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하게 된다. 말 그대로 규산염이 빠져나오면서 생긴 유리 플라스크의 미세한 상처가 유기물의 합성을 돕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결국 1952년 밀러의 실험 결과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유리 플라스크 자체에 의해 오염되어버린 결과였다는 뜻이다! 게다가 당연해 보이는 실험 용기 자체에 의한 오염 여부를 확인하는 검증 결과가 이제서야 제시되었다는 점도 굉장히 흥미롭다.
그렇다면 밀러의 연금술 실험은 결과가 오염된 의미 없는 실험으로 전락되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의도치 않게 실험 결과가 오염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더 실제 초기 지구의 환경에 가까운 조건이 충족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실제 초기 지구에서도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와 화산으로 뜨겁게 달궈진 바다, 그리고 규산염으로 가득한 암석의 환경 속에서 유기물이 합성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지구 지각의 규산염도 이러한 유기물의 합성을 더 촉진하고 돕는 중요한 촉매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구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암모니아, 메테인이 유기물로 침전되면서 대기 중 함량이 줄었을 것이다. 결국 완벽하게 세심하지 못했던 밀러의 실험 세팅이 오히려 더 사실에 가깝게 지구의 초기 조건을 묘사한 흥미로운 결과가 되었다.
오래전 지구에서 벌어졌을 유기물의 합성 과정은 지구와 유사한 다른 행성에서도 충분히 벌어졌을 것이다. 과연 지구 생명의 탄생 과정은 지구에서만 벌어진 특이한 사례였을까, 아니면 다른 비슷한 행성에서도 흔치 않게 벌어지는 우주 보편적인 과정이었을까? 언젠가 인류가 지구가 아닌 또 다른 생명 탄생의 성공 사례를 발견할 때 비로소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얻게 될 것이다.
참고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98-021-00235-4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ence.117.3046.528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은하진화연구센터 및 근우주론연구실에서 은하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진화를 연구하며,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고 있다. ‘썸 타는 천문대’, ‘하루 종일 우주 생각’, ‘별, 빛의 과학’ 등의 책을 썼다.
지웅배 과학칼럼니스트
galaxy.wb.zi@gmail.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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