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최근 수년간 산업계의 가장 핫한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이었다. 2016년 벌어진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은 인공지능이 인간 생활 전반에 미칠 파급력이 굉장할 것이라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각인되었다. 실제로 인공지능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삶 전반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각종 ‘비대면, 디지털, 원격’ 솔루션을 실험할 수 있는 판이 펼쳐지면서 인공지능의 발전은 가속화되었다. IT 분야뿐만 아니라 금융, 자동차, 교육, 의료 등 생활 전반에서 인공지능이 손을 뻗치지 않은 곳은 없을 정도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수의 글로벌 대기업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을 잘 활용한 사업 아이템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한 스타트업은 금세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AI, 딥러닝, 머신러닝은 성공에 이르는 ‘마법의 단어’와도 같았다. 특히 미국과 중국이 인공지능 분야를 이끌고 있다. 하지만 혁신을 주도하는 인공지능이 개인과 사회에 끼칠 새로운 위험과 부정적 결과에 우려를 표하고 규제를 선도하는 곳은 유럽이다.
유럽은 인공지능 기술 분야에서도 선도적인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가치, 인권, 원칙에 기반해 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발맞춰 EU집행위원회는 지난 4월 21일 인공지능의 활용, 투자, 혁신을 강화하면서도 인공지능 개발 및 활용에 대한 신뢰, 기본권, 사용자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인공지능법(EU artificial intelligence act) 초안을 마련했다. 이어 9월에는 얼굴인식 규제안(Regulating facial recognition in the EU)를 발표했다.
이 발표는 전 세계의 인공지능 관련 기업을 긴장에 빠뜨렸다. 지금까지 개발한 인공지능 기반 제품, 서비스, 시스템과 이를 상용화하는 과정이 EU 인공지능법에 위배되지는 않을지, 특히 유럽에 회사가 없더라도 유럽 시장에 출시되고 사용되는 상품을 개발하는 회사에도 이 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많은 인공지능 스타트업들로서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문제다. 그렇다면 유럽의 스타트업들은 EU 인공지능법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을까.
#EU 인공지능 법안의 내용
EU 인공지능 법안에서는 AI를 위험 정도에 따라 불허용 위험, 고위험, 제한적 위험, 최소 위험 등 네 가지로 구분해 규제를 달리 적용한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얼굴 인식을 포함한 생체 인식, 신용 평가 등 ‘고위험 인공지능’에 대해 강력한 규제를 명시한다는 점이다.
고위험 인공지능 서비스의 경우는 적절한 위험 평가 및 관리 시스템, 고품질의 데이터 세트, 추적을 위한 로그 자료 등을 확보하고, 시스템에 대한 모든 정보가 포함된 상세 문서, 명확하고 적절한 정보의 제공, 리스크 최소화를 위한 인적 감독 조치, 높은 수준의 보안 및 정확도 등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는 의료, 교통 등 시민들의 생명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서비스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미 상용화되었거나 출시가 예정된 시험 채점, 수술 보조, 이력서 분류 소프트웨어, 법적 증거의 신뢰성 판단, 이주 또는 망명 및 국경 통제, 사법 행정 및 민주적 절차에 사용되는 인공지능 기반 서비스들은 EU가 제안하는 수준의 기술력과 보안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데이터 관련 금지 요건을 위반할 경우 3000만 유로(약 410억) 또는 전년도 총매출액의 6% 중 높은 금액을 한도로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도 높은 제재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즉, 이 규제안은 막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스타트업에게는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라는 의미다.
#인공지능 규제안에 따른 유럽 스타트업의 움직임
인공지능법 시행을 위해서는 회원국 간의 협의, 승인 등 절차가 요구되기 때문에 시행까지는 최소 2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법률이 시행되기까지 관련 스타트업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다. 유럽 스타트업 전문 미디어 ‘시프티드(sifted)’는 “인공지능법 초안을 꼼꼼하게 읽고, 유럽의 개인정보보호법인 GDPR 등의 선행 규정을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데이터혁신센터(center for data innovation)에 따르면 현재 EU의 경제 규모는 13.3조 유로(1경 8150조 원)에 이르는데, 이 중 약 35%인 3.4조 유로(4641조 원) 규모가 EU 인공지능법이 규정한 ‘고위험 인공지능’의 범주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얼굴인식 등의 생체 인식 식별 서비스, 신용도 평가 등을 활용하는 서비스 스타트업들도 자신의 서비스가 어디에 속하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컨설팅 회사 맥킨지(McKinsey)는 먼저 인공지능 시스템의 문제 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 관리 전략을 수립하고 AI 업계 전문가, 법률전문가, 제품 개발자, 보안 담당자 등으로 구성된 거버넌스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이후 이 거버넌스를 통해 AI 서비스에 대한 감사와 지속적인 검토를 하고, 민감한 개인정보를 다루는 회사는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 관리에 관한 명확한 프로토콜을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EU 위원회는 인공지능법의 실행 및 감독 책임을 회원국에 위임한다. 따라서 유럽에 제품을 출시하고 회사 설립도 고려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라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 스타트업 친화적이고 혁신적인 제도를 마련한 국가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EU 위원회에서 발표한 ‘2021 유럽 혁신 스코어보드(European Innovation Scoreboard)’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했다. 그 뒤를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이 잇고 있다. 유럽 어떤 지역에 회사를 설립하는지에 따라서 스타트업에게는 그 시작이 도약의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데이터혁신센터에서는 스타트업들이 규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연구 결과도 지난 7월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스타트업이 하나의 ‘고위험 인공지능’ 제품을 보유한 경우 최대 40만 유로(5억 4610만 원)의 규정 준수 비용이 들고, 평균 40%의 이익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이는 규제에 따른 관리, 행정 비용이고, 이로 인해 향후 5년 동안 최대 310억 유로(42조 3240억 원)의 손실이 발생하고 투자는 최대 20%까지 감소할 전망이다.
이 연구를 이끈 벤자민 뮐러 데이터혁신센터 수석정책연구원은 “EU의 인공지능법을 준수하려면 많은 비용이 드는데, 이는 유망한 AI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들이 대기업에 비해 출발선이 불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비판했다.
그러나 유럽디지털중소기업연합(European Digital SME Alliance)의 사무총장 세바스티아노 토팔레티는 “현재 초안이 스타트업 친화적이지 않다는 점은 아쉽지만, 오히려 스타트업에 명확한 기준을 제안해준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며 “유럽 법안이 자리를 잡으면 현재 GDPR과 유사하게 국제 표준의 기능을 할 것이고, 그렇다면 유럽의 스타트업들은 사실상 글로벌 AI 기준을 선도하는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라며 긍정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이에 유럽 스타트업들은 유럽위원회에 다양한 의견을 전달하기 위한 커뮤니티를 결성하고 있다. AI 스타트업 그룹인 ‘스타트업스 포 AI(Statups for AI)’은 유럽 스타트업으로서 새로운 AI 솔루션을 구축하고 확장하기 위해 정책에 관여하고 공공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데에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핀란드의 건강관리 AI 스타트업 프레디셀(Predicell), 젖소의 착유 과정에 자동화 AI 솔루션을 제공하는 스웨덴의 애니멀스(Animals), 오디오 AI를 활용한 의료 상담 분석 및 지원 솔루션을 내세운 덴마크의 코르티(Corti), 네덜란드의 물류 AI 스타트업 피지르(Fizyr), AI 기반 문서 정보 분석 솔루션을 제공하는 오스트리아의 코르티칼.아이오(cortical.io), 스페인의 브랜드·저작권 보호를 위한 온라인 플랫폼 레드 포인트(Red Point), 지능형 에코 드라이빙 시스템 솔루션을 제공하는 포르투갈의 스트라티오(Stratio)가 스타트업스 포 AI를 이끄는 앰버서더로 적극 활동하고 있다.
그 밖에 기술 스타트업들이 유리한 정책 입안을 위해 힘을 모으는 코아데크(COADEC)는 AI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기술 기반 스타트업들의 의견을 수렴해 유럽 인공지능법 초안에 대한 자체 선언문을 발표하며 정책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AI 스타트업들이 규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유럽의 방식을 이해하는 현지 스타트업들은 정책이 논의되고 새로운 법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혁신의 동인을 얻고, 규제를 잘 준수하는 법률 수호자로서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필자 이은서는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향수병에 못 이겨 다시 베를린에 와 살고 있다. 다양한 스타트업과 함께 일하며, 독일 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 한국 시장을 공략하려는 독일 기업을 안내하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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