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클라리스가 돌아왔다. 이름만 말해서는 짐작이 안되겠지만, ‘스탈링’이란 성을 붙이면 무릎을 탁 칠 사람들이 많을 거다(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30대 이상이겠지).) 흔히 ‘스탈링 요원(Agent Starling)’이라 불리는 클라리스 스탈링을 주인공으로 한 미드 ‘클라리스’(CBS)가 왓챠의 독점 콘텐츠 ‘왓챠 익스클루시브’를 통해 공개됐다. 드라마는 1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됐는데, 미리 말하자면 그 유명한 한니발 렉터는 나오지 않는다.
클라리스 스탈링이란 인물이 영상매체에 등장한 것은 1991년 영화 ‘양들의 침묵’부터. 미국 소설가 토머스 해리스의 ‘한니발 렉터’ 시리즈 중 3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은 ‘양들의 침묵’은 어마어마한 흥행성적, 199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작품상, 각색상을 모조리 수상한 그랜드슬램으로 유명한 명작이다. 유능한 정신과 의사이자 식인마인 한니발 렉터를 연기한 안소니 홉킨스와 한니발을 만나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잡는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탈링을 연기한 조디 포스터의 빼어난 연기는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 한니발 렉터 시리즈의 영상화는 이후 영화 ‘한니발’ ‘레드 드래곤’ ‘한니발 라이징’, 드라마 ‘한니발’로 이어지지만 클라리스 스탈링이 등장하는 건 ‘양들의 침묵’과 ‘한니발’뿐이다. 시리즈 자체의 주인공이 한니발 렉터이기도 하거니와 워낙 한니발이란 인물이 대중을 압도하는 캐릭터이기에 그간 클라리스 스탈링에 대한 관심은 적은 편이었다. 그런데 한니발을 배제한 드라마라니, ‘양들의 침묵’에 여전히 전율하는 팬들의 궁금증을 당길 만하다.
‘클라리스’는 ‘양들의 침묵’에서 클라리스가 ‘버팔로 빌’이란 연쇄살인범을 잡고 난 뒤 1년가량 시간이 지난 때를 배경으로 한다. ‘버팔로 빌’ 사건으로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힘들어하던 클라리스는 행동과학부 안에서만 머물며 현장으로 나오지 않던 상태. FBI 조직 또한 그의 심리 상태를 의심하며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하던 중이었는데, 그런 클라리스를 법무부 장관 루스 마틴이 워싱턴으로 불러내 새로운 연쇄살인사건을 맡긴다. 루스 마틴의 딸 캐서린은 클라리스가 버팔로 빌로부터 구해냈던 마지막 생존자인데, 캐서린 역시 PTSD로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며 오직 클라리스와 연락하길 갈망한다. 드라마는 세 명의 여성이 같은 수법으로 살해당한 연쇄살인사건을 쫓는 클라리스를 비추는 가운데, PTSD와 과거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클라리스의 내면도 쫒는다.
2001년 영화 ‘한니발’에는 ‘버팔로 빌’ 사건 이후 10년이 지난 뒤의 클라리스 스탈링이 나오는데(그땐 줄리앤 무어가 연기), 그때도 클라리스는 FBI 내에서 유명인사지만 여러모로 눈엣가시인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한니발 렉터 박사의 힌트가 있었다지만 FBI 수습요원이던 젊은 여성이 쟁쟁한 선배들의 헛발질을 제치고 단독으로 범인을 잡았으니 클라리스가 FBI의 얼굴이 된 동시에 본의 아니게 FBI 명성에 먹칠해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니 사건으로부터 고작 1년이 지난 후인 ‘클라리스’의 클라리스 상황은 오죽하랴. 새로운 상관인 폴 크렌들러는 물론 팀원 대부분이 클라리스를 반기지 않는다. 클라리스는 본인의 내면을 힘겹게 부여잡으면서, 동료들의 마음을 얻으며 ‘팀’이 되는 법을 경험해야 하고, 얼핏 보면 미치광이의 연쇄살인처럼 보이지만 거대한 권력이 배후로 있는 것이 의심되는 계획적인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삼중고를 겪게 된다.
13부라는 에피소드도 그렇고, 광기 어린 살인마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주목하는 만큼 ‘클라리스’는 ‘양들의 침묵’ 같은 압도적인 공포나 스릴을 선사하진 않는다. 살인마를 걷어내어 사라진 공포와 스릴의 자리에는 거대한 사건을 차근차근 풀어가는 범죄 추리극의 장르적 재미, 점차 ‘원 팀’이 되어가는 동료들과의 ‘케미’, 미처 알지 못했던 클라리스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밝혀가는 서사 등이 채운다. 특히 작중 시대가 1990년대 초반인 만큼 여성과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인데, 클라리스의 절친한 친구인 흑인 여성 아델리아를 내세워 이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풀어가는 점도 눈에 띈다.
‘레트로’가 장기적 트렌드가 되면서 대중문화에서 1980년대~2000년대 초반을 샅샅이 훑는 가운데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클라리스’가 등장해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의 향수를 건드리는 면도 있다. 당장 ‘양들의 침묵’만 해도 개봉한 지 30년이 흐르지 않았나! ‘클라리스’를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면 ‘양들의 침묵’부터 다시 보면 좋겠다. 그러고 나서 ‘클라리스’를 보면 한니발에 가려져 있던 생존자들의 마음에 좀 더 이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 접하는 요즘 친구들이라면 이 명작의 명성을 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될 거고.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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