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10여 년 전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그게 내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내 직업(신문기자)과 전혀 상관없는 영화와 문화연구를 전공했고, 졸업할 때에는 한국 대중음악에 대해 논문을 썼다. 그저 당시의 내 마음을 따른 것일 뿐이다. 그때의 시간이 훗날 타국 땅에서 일자리를 찾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될 줄이야!
지난달부터 베트남의 한 대학에서 한국문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벌써 이번 주가 중간고사 기간이다. 며칠 전 7주 동안 가르친 내용을 복기하며 시험문제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동안의 시간을 회상하게 됐다.
수업을 마치기 전 학생들에게 다음 주에 배울 주제와 관련해 간단한 과제를 낸다.
“다음 시간에는 한국의 음식에 대해 배울 거예요. 각자 한국의 음식 중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오세요.”
이런 식의 간단한 주문이다. 그리곤 다음 시간에 출석을 확인하며 전 주에 낸 과제에 대한 대답을 듣는다.
내가 가르치는 약 150명의 베트남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은 불고기나 간장게장 같은 거창한 음식이 아니었다. 길거리 음식인 떡볶이였다. 김밥이나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좋아한다고 대답한 학생도 많았다. 베트남 학생들의 대답을 듣고 나니 한국에 살 때 그토록 흔해 보였던 음식들이 다르게 다가왔다. 그날 수업에서는 ‘먹방’ 영상을 많이 봤는데, 정말 ‘고향의 맛’에 대한 그리움 지수가 최고치를 찍었다. 호찌민에도 한국식당이 있지만 당시에는 코로나로 모든 영업이 정지된 봉쇄 상황이어서 더욱 그랬던 듯하다.
‘한국에 돌아가면 고독한 미식가처럼 한국의 맛집을 섭렵하리라!’
학생들 몰래 이런 다짐을 했다.
지난 주 수업의 주제는 한국의 여행지였다. 출석을 부르며 가장 가고 싶은 서울의 여행지를 물었다. 다들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니 강남이나 이태원, 홍대 같은 곳을 대답할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의외로 가장 많은 학생이 대답한 곳은 N서울타워(구 남산타워)였다.
“남산타워에 올라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고 싶어요.”
“한복을 입고 경복궁을 거닐고 싶어요.”
“남대문시장에서 쇼핑을 하고 다양한 길거리 음식도 맛보고 싶어요.”
학생들의 대답을 들으며 생각해 봤다.
‘내가 저곳들에 가본 게 언제였지?’
최근 10여 년 동안 남산타워나 경복궁, 남대문시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나 스스로도 놀랐다. 그동안 여행기자로 살면서 매달 세계 구석구석을 누볐지만, 정작 출퇴근하며 매일 지나치던 그곳들에는 발을 들여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또 한 번 다짐했다.
‘서울에 돌아가면 남대문시장의 허름한 식당에서 갈치조림도 먹고, 아들과 함께 남산타워에 올라 서울의 야경도 만끽하리라!’
수업 준비를 하며 평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에서 의외의 발견을 하기도 한다. 한국 지폐에 대한 수업을 준비할 때였다. 지갑 속에서 잠만 재우던 지폐를 난생처음으로 꼼꼼히 살펴보았다. 지폐 속에는 세종대왕, 신사임당, 이황, 이이 등 조선시대의 역사적 인물 외에도 숨겨진 것들이 많았다.
그중 내 마음을 사로잡은 그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1000원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진 그림이다. 그림이 겸재 정선의 작품이란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퇴계 이황이 머무르던 도산 서당을 중심으로 주변 산수를 담은 작품이다. 이 그림을 학생들에게 설명하면서 ‘아, 저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자연 속에 자리한 서당 안에 점처럼 작은 사람 한 명이 보이는데 그가 바로 이황이다. 그림 속 그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의 이름은 ‘계상정거도’인데, ‘계상정거’란 ‘모든 권좌에서 물러나 시냇물 흐르는 곳에 자리 잡고 고요하게 산다’는 뜻이라고 한다.
베트남에 와서 베트남 학생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가르치며 노년의 꿈이 생길 줄은 몰랐다. 멕시코의 한적한 해변 생활을 꿈꾸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처럼 나도 ‘계상정거’의 삶을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김면중은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에 입문, 남성패션지, 여행매거진 등 잡지기자로 일한 뒤 2020년까지 아시아나항공 기내지 편집장으로 근무했다. 2021년 호찌민외국어정보대 한국학과에서 한국문화를 가르쳤으며 현재는 RMIT University Vietnam에서 Asian Popular Culture 및 Asian Cinemas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김면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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