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우리나라 제약 산업은 경제 규모에 비해 매우 더디게 발전했다. 국가 주도로 특정 산업을 집중 육성해 단기간에 산업화를 이루었지만, 제약 산업은 기초 과학이 뒷받침돼야 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신음하는 요즘, 우리나라는 ‘카피약 강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선진국과 나란히 경쟁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비즈한국’은 우리나라 제약 산업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봄으로써 우리 제약 산업이 지닌 잠재력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점쳐본다.
‘OO(제품명) 주세요.’ 병원이나 약국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감기에 걸렸을 때 감기약을 달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소비자(환자)들도 있지만, 브랜드 이름을 대며 특정 약을 요구하는 이들도 적잖다. 그 이름이 뇌리에 박혔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상표명이 중요한 이유다. 마케팅 업계 관계자는 “환자들이 진료 전에 먼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의사가 처방을 내어줄 때 제품 브랜드를 확인하는 사례가 많다”며 “의사들 역시 제네릭(복제약)을 처방할 때도 잘 알려진 제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귀띔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이라 불리는 활명수도 ‘목숨을 살리는 물’이란 의미를 지녔다. 당시 위장장애·소화불량으로 고통을 겪던 국민들에게 어필할 최상의 제품명이었던 셈이다. ‘활명수 100년 성장의 비밀’을 써낸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전 동화약품 사외이사)는 “약품이 소비자에게 줄 수 있는 이로움 중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 면에서 활명수는 강점을 압축해서 표현해주고, 기억하기 쉬운 강점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세 음절로 이뤄져 발음하기도 쉽다”고 했다.
이름을 잘 지은 제품은 마케팅에 유리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고, 그러다 보니 소비자들에게 잘 알려진 제품과 유사한 상표를 출원하려는 제약사도 적잖다. 약 이름을 둘러싸고 기업 간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다. 소비자가 오인하는 상황을 막아 시장 점유율을 지키려는 선발 업체들과, 선발 업체의 후광을 조금이라도 누려 시장에 침투하려는 후발 업체들의 싸움이다. 시장에 새롭게 진출하기 위해 ‘사실상 죽은 상표를 우리가 쓰게 해 달라’는 상표취소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약 이름을 둘러싼 분쟁 사례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가탄’, ‘팔팔’ 등 활발한 상표권 분쟁…다국적 제약사가 제네릭 제품명 문제 삼기도
제약사의 상표권을 둘러싼 다툼은 꾸준히 일어나왔다. 대표적으로 명인제약의 잇몸치료제 ‘이가탄’을 둘러싼 분쟁을 들 수 있다. 명인제약은 이가탄과 ‘이가탄 가글’ 상표를 05류(감각기관용 약제, 구강소독제 등)로 각각 1992년과 1998년 출원해 등록받았다. 이후 2008년 상표권을 갱신하고, 2009년에는 이가탄 가글을 치약류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변경했다.
그런데 2015년 4월 애경산업이 ‘이가탄 Igatan’이라는 상표를 03류(치약 등)로 출원하며 다툼이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 애경산업 산하 애경유지공업은 ‘덴탈크리닉 2080 잇몸탄탄 이가탄탄’, ‘덴탈크리닉 2080 시림잡고 이가탄탄’, ‘덴탈크리닉 2080 잇몸탄탄 이가탄탄’이라는 상표도 출원했다. 그러나 ‘이가탄 Igatan’ 상표에 대해서는 애경산업이 명인제약과 동일한 ‘이가탄 Igatan’ 상표를 써야 하는 의견서를 특허청에 제출하지 않으면서 2016년 4월 특허가 거절됐다.
명인제약은 특허청에 이의제기를 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당시 ‘잇몸튼튼 이가탄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던 명인제약은, 애경산업이 이가탄탄을 사용하면 안 되는 이유로 △‘이가탄탄’이라는 상표가 자사의 제품명과 유사하며, △이가탄은 매년 수백억 원대의 매출을 유지하고 있고, △10년간 이가탄 광고비를 투입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특허청이 2016~2017년 사이 애경산업이 출원한 상표를 모두 거절하며 명인제약은 이가탄을 지킬 수 있었다.
‘팔팔’을 지키기 위한 한미약품의 고군분투도 흥미롭다. 한미약품은 2012년 발기부전치료제 비아그라의 제네릭인 팔팔을 출시했고, 2013년 상표를 출원해 2015년 등록받았다. 그러나 팔팔을 제품명에 쓰려는 건강기능식품 업체들과 싸움이 이어졌다. 그러한 한미약품은 ‘청춘팔팔’, ‘비타D팔팔’, ‘맨프로팔팔’, ‘맨즈팔팔’에 대해 제기한 상표권 무효소송에서 승소했다.
올해 3월 건강보조식품 ‘맨즈팔팔’ 관련 판결문을 보면 특허심판원은 “한미약품의 팔팔은 발기부전치료제 시장 점유율 1위로 국내 소비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주지·저명 상표다. 그런데 맨즈팔팔과 팔팔은 상표가 유사한 데다 품질, 용도, 수요자층이 동일하다. (맨즈팔팔은) 상품출처의 오인과 혼동을 일으켜 수요자를 기만할 염려가 있다”며 맨즈팔팔 상표를 무효로 했다.
다국적 제약사와 국내 제약사의 상표권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주로 신약(오리지널약)의 특허가 끝난 후 국내 제약사의 제네릭이 쏟아지자, 이들의 시장 침투를 막기 위해 다국적 제약사가 상표권 소송을 제기하는 식이었다.
대표적으로 미국 BMS는 B형간염 치료제 ‘바라크루드’의 특허 만료 후 동아에스티와 대웅제약의 제네릭인 ‘바라클정’과 ‘바라크로스’에 대해 상표 등록 무효 심판을 각각 2016년과 2017년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특허심판원은 이를 모두 기각 처리했다. “전체적으로는 상표가 비유사하며, 바라크루드의 상표 사용 기간이 비교적 짧고 상품의 인지도를 확인하는 광고비 등 현황을 확인할 수 없고 상품의 수요자도 간염환자에 국한된다”는 이유다.
#최근 종근당, 동아제약은 ‘얼박’ 상표 합의…결국 자사만의 ‘브랜드 네이밍’ 전략 필요
약 이름을 둘러싼 다툼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종근당과 동아제약 사이에서는 ‘얼박’ 상표권을 둘러싼 분쟁이 있었다. 얼박은 종근당이 자양강장변질제 등 05류로 2015년 출원해 2016년 등록한 상표다. 그런데 2020년 8월 동아제약이 취소 심판을 제기하며 분쟁이 촉발됐다. 동아제약 관계자는 “3년간 얼박 상표권의 사용 내역이 없었다. 박카스는 동아제약 대표제품으로 얼박이라는 제품을 공식 출시한 적은 없으나, ‘얼음+박카스’로 소비자들에게 인식되고 있어 심판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특허심판원이 종근당의 상표를 취소한다고 결정하며 동아제약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종근당은 올해 2월 항소하며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종근당과 동아제약이 합의에 이르러 지난 9월 7일 자로 소송은 종료된 것으로 확인됐다. 동아제약 관계자는 “양사가 상표권 양도양수에 합의해 종료됐다. 올해 여름 이벤트성으로 얼박이라는 제품을 기업간거래(B2B) 방식으로 소량 판매했으나 정식 판매 계획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8월과 올해 1월 동아제약은 얼박 관련 상표권을 출원한 상태다.
약 이름이 중요한 만큼 업계에서는 앞으로도 상표권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앞서의 마케팅 업계 관계자는 “현재도 신약을 출시한 다국적 제약사들이 국내 제약사들의 상표를 문제 삼는 경우가 다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 사태 ‘타이레놀’ 품귀 현상으로 대두된 ‘성분명 처방’이 현실화하더라도 상표 분쟁은 계속될 거라는 예상도 나온다. 바이오기업 관계자는 “오히려 영업사원들 사이에서는 (브랜드) 경쟁이 치열해질 것 같다”고 의견을 밝혔다.
결국, 소비자들에게 각인되는 이름을 짓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숫자 등을 활용해 제품명을 두세 글자로 쉽고 재미있게 지어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면서도, 약의 효능을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은 매출로도 직결된다. 제약사들은 브랜딩 업체에 작명을 맡기는 경우도 있지만 내부에서 직접 담당하는 경우도 적잖다고 밝혔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제품의 매출이 잘 나오고 소비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면 경쟁사에서 (비슷하게 이름을 지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결국 각자의 네이밍 전략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편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의약품 제품명 부여 사례집’을 통해 기존 의약품·의료기기·건강기능식품과 동일한 상표명을 사용하면 소비자가 기존 제품으로 오인할 경우가 있어서 사용이 제한된다고 안내하고 있다. 또 치료제의 효과를 이름에 나타내려는 경우 노골적으로 성적 표현을 담고 있는 상표는 사용이 제한된다. 제품명은 허가사항에 해당하며 제약사에서 품목허가를 신청하면 식약처에서 제품명의 적절성을 검토한다.
김명선 기자
line23@bizhankook.com[핫클릭]
·
[K제약 스토리] 대기업의 바이오 신약 도전이 쉽지 않은 까닭
·
[K제약 스토리] 제약·바이오 기술수출 6조 원, 정말 성과일까
·
[K제약 스토리] '한국판 화이자' 꿈꾸는 제약사 M&A 역사
·
[K제약 스토리] '천연두에서 백신 주권까지' 우리나라 백신의 역사
·
[K제약 스토리] 33호까지 나온 K-신약 '아직 갈 길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