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예전에는 ‘민폐 여주’가 대중문화 도처에 널렸었다. 여자 주인공이 수동적인 모습으로 극 중 인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캐릭터로 등장해, 까칠한 천재형 남자 주인공 혹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자형 남자 주인공의 도움없이 성장하지 못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흐름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대중은 ‘여풍’ ‘걸크러시’라 불리는 강한 여성 캐릭터에 환호를 보낸다. 최근 인기인 SBS드라마 ‘원 더 우먼’의 조연주(이하늬)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마이 네임’의 윤지우(한소희)도 이런 여성 캐릭터의 연장선상인데, 특히 한국에서 흔치 않은 여성 액션 연기를 선보여 눈길을 끈다.
먼저 ‘원 더 우먼’의 조연주를 보자. 서울대 나와 사법고시를 패스해 검사로 재직 중인 조연주는 실세 라인을 타고 ‘스폰’을 받는 ‘비리 검사계의 에이스’로 등장한다. 여자 검사가 어리바리한 긴입이나 민폐 성장형 캐릭터로 나오지 않고 도리어 모종의 목적을 위해 비리 검사로 등장하는 것도 신선한데, 심지어 조직폭력배 행동대장의 외동딸이라 엄청난 운동 신경과 무술 실력이 막강하다. 수사 중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은 조연주가 자신과 얼굴이 똑같이 생긴 재벌 한주그룹의 며느리이자 유민그룹의 유일한 상속녀 강미나로 신분을 착각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그래서 폭풍웃음의 연발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자신이 강미나라고 해서 재벌가 며느리로 고분고분 조용히 살려고 해도 내 몸의 본능이 어느 순간 뛰쳐나온다. 자신을 핍박하며 외국어로 ‘왕따’를 시키는 시가 식구들에게 영어, 프랑스어, 베트남어까지 유창히 구사하며 입을 틀어막는 것은 물론, 자신을 윽박지르는 시가 식구들에게 거침없이 포효한다. 조용히 하라고 소리지르는 시아버지에게 “언성 높은 사람이 이기는 겁니까? 여기가 무슨 노름판도 아니고 왜 갑자기 소릴 질러요? 아이고, 깜짝이야!”라고 두 배로 소리지르는 모습에서 이상한 쾌감을 느낀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다. 누군가 습격했을 때 얻어맞고 쓰러지거나 납치당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를 이용해 자신을 지키는 모습도 시원한 쾌감을 안겨준다.
‘마이 네임’의 윤지우는 자신의 눈앞에서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아버지가 몸담은 조직폭력배에 들어가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우고 신분세탁 후 경찰로 잠입하는 ‘언더커버’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자 목숨을 건 상황인 만큼 윤지우는 그야말로 ‘괴물이 되는 것을 마다 않는’ 극한의 상황이다. 남다른 운동신경으로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타던 열일곱 여고생이었지만,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이를 위해 윤지우는 ‘동천파’에 들어가 우글거리는 남자들 사이에서 상대의 급소를 노리며 싸우는 것을 배운다. 동천파 보스 최무진(박희순)의 일대일 과외가 있었다지만 동천파 훈련소에 들어가 그 안의 남자들을 모두 제끼고 이기는 장면은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2001년 개봉한 영화 ‘조폭 마누라’의 차은진(신은경)이 이와 흡사한 모습일 것 같다. 아니면 ‘킬 빌’의 오렌 이시이(루시 리우) 정도. ‘마이 네임’의 윤지우는 피지컬의 한계를 처절한 복수심과 갈고 닦은 노력으로 상쇄하며 목표를 향해간다. 오혜진이란 이름으로 언더커버로 경찰에 잠입했을 때도 윤지우가 여자라는 저항은 그리 크지 않다. 마약수사대에 발령 받자 선배 형사인 전필도(안보현)가 상사에게 “쟤를 업고 다니란 말입니까?”라며 항의하지만, 한 번 시험해보고 쓸 만하다고 생각한 이후 ‘여자라서’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원 더 우먼’과 ‘마이 네임’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한쪽은 안방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한 지상파 드라마요, 한쪽은 전 세계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다. 한쪽은 ‘빌런 재벌가에 입성한 불량지수 100% 여검사의 더블라이프 코믹버스터’라는 슬로건처럼 철저하게 코믹을 내세운 장르이고, 한쪽은 ‘괴물이 되어도 좋다. 넌 내가 죽인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범죄 액션 누아르 장르다. 공통점은 여성이 원톱 주연을 맡고 있고, 주연을 맡은 이하늬와 한소희 모두 원톱 주연을 처음 맡았으며, 두 배우 모두 극중에서 시원시원한 액션을 선보인다는 정도. 장르가 다르기에 액션의 결이나 분위기도 다르지만, 두 배우의 노력이 눈에 훤히 보이는 건 같다.
태권도 유단자에 스쿠버 다이빙, 필라테스 등 몸을 사용하는 것에 능숙한 이하늬는 ‘극한직업’ 등 그간 거쳐온 작품을 통해 쌓은 액션 실력과 수개월간 액션스쿨에 다니며 쌓은 노력을 유감없이 선보인다. 큰 키를 이용한 시원시원한 액션, 미모에 반하는 망가지는 연기에 스스럼없는 모습이 어우러져 이하늬에 대한 호감은 날로 상승 중이다. 20대 여자 배우 중 손꼽히는 인물인 한소희도 마찬가지. ‘부부의 세계’의 내연녀로 스타덤에 오른 한소희는 ‘마이 네임’에서는 10kg을 증량하며 ‘벌크업’한 모습에, 립밤만 겨우 바르는 민낯으로 타고난 미모를 뒤로 한 채 액션에 몰두했다. 처절하게 구르고 짓밟는 짐승 같은 액션을 보면 이 배우의 욕심을 짐작할 만하다.
대중문화 영상매체의 모든 여주인공이 강하고 주체성 뚜렷한 ‘걸크러시’일 순 없다. 현실에서 여자든 남자든 성별 상관없이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용감한 사람, 비겁한 사람 등 제각각이듯, 영화나 드라마 속 인물들도 서사에 따라 부여 받은 역할이 있을 것이니까. 다만 오랜 기간 능력 있는 남자 주인공에 캔디형, 민폐형 여자 주인공을 붙이는 관습이 이어져 왔기에, 그간 보기 힘들었던 ‘걸크러시’ 여자 주인공들에 대중이 환호를 보내는 것이리라. 제일 좋은 건 ‘걸크러시’라는 말이 아예 쓰이지 않을 만큼 남녀 캐릭터 모두 현실을 반영해 고루고루 등장하는 것일 테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이 흐름을 즐겨봐도 좋다. 그 흐름 속에 빛나고 있는 이하늬와 한소희의 다음 작품을 응원한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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