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주부를 얕보지 마!” 부부싸움 간에 튀어나오는 말이 아닌가 싶지만, 웬걸, 이 외침은 얼굴에 기다란 칼자국을 지닌 험상궂은 인상의 한 남자의 말이다. 한때 ‘불사신 타츠’로 불렸던 전직 야쿠자 출신인 이 남자의 현재 직업은 전업주부다.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앞치마를 두른 채, 아내가 잊고 간 도시락을 전달하려 자전거를 타고 동분서주하지만 걸핏하면 순찰 중인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당하는 처지다.
전업주부가 된 야쿠자 타츠가 주인공인 ‘극주부도’는 야쿠자들이 자신을 협객의 의미로 쓰는 극도(極道)에 주부를 삽입한 제목이다. 오오노 코스케의 만화로 시작해 성우 겸 배우인 츠다 켄지로가 주연을 맡은 실사 CM으로 기대를 모았고, 이후 타마키 히로시 주연의 실사 드라마가 제작되더니, 뒤이어 츠다 켄지로의 목소리를 입힌 애니메이션으로 뻗어 나갔다.
실사 드라마 ‘극주부도’는 왓챠에서, 애니메이션 ‘극주부도’는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이게 애니는 애니대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보는 맛이 있다. 무엇보다 야쿠자와 주부라는 절대 상극처럼 보이는 캐릭터가 융합되는 데서 벌어지는 아이러니의 재미가 쏠쏠하다. 조폭들이 얼떨결에 아기를 키우게 되는 옛날 만화 ‘키드갱’이나 기억상실이 된 킬러가 자신의 정체성을 무명배우로 착각하며 소동이 벌어지는 영화 ‘럭키’ 같은 아이러니와 흡사한 부분이 있달까.
‘불사신 타츠’로 야쿠자 세계에서 전설처럼 불리는 타츠는 아내 미쿠를 만나며 암흑세계에서 은퇴하고 전업주부의 길을 걷게 된다. 영화 ‘럭키’에서 기억을 잃은 킬러가 몸에 각인된 칼솜씨로 분식집에서 화려한 기술을 뽐냈던 것처럼, 타츠 역시 현란하게 식칼을 놀리며 아내의 도시락을 요리한다. 귀여운 곰돌이 모양의 주먹밥이나 하트 장식은 기본이다. 완성된 음식을 다각도에서 사진 찍고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건 필수다. 무엇보다 이 남자, 전직이 의심스러울 만큼 집안일에 진심이다. 최첨단 로봇청소기도 지나치는 방 구석구석을 정성스레 청소하고, 과탄산소다로 빨래 얼룩을 하나하나 지우는 것도 능숙하다. 단 몇 번의 손놀림만으로 티셔츠를 마치 매장에 진열된 것처럼 개키는 걸 보면 감탄이 나올 정도.
‘극주부도’는 문신이 온몸을 뒤덮은 험상궂은 인상의 타츠가 야쿠자 세계에서 익힌 말버릇과 행동을 주부의 삶에 대입하며 일어나는 자잘한 소동들이 웃음을 자아낸다. 여기에 아내 미쿠를 포함해 타츠의 주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한 개성’하며 눈길을 끈다. 타츠의 야쿠자 시절 막내였던 마사, 타츠와 쌍벽을 이루던 라이벌이었으나 출소 후 크레페 푸드트럭을 운영 중인 토라지로, 조직 두목이었던 남편을 대신해 조직원들을 부양하고자 마트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누님’, 전업주부인 타츠의 선배로 물심양면 도움을 주는 부녀회장 등 재미난 캐릭터들이 한 꾸러미다.
물론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인 ‘극주부도’와 왓챠에 업로드된 드라마 ‘극주부도’에는 차이가 있다. 애니메이션은 편당 15~18분가량의 짧은 분량의 10개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원작 만화책을 보듯 움직임을 최대한 동적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역동적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정적인 느낌의 애니메이션이 아쉽게 느껴질 수 있다. 물론 실사 CM에 등장해 엄청난 싱크로율이라며 환영을 받았던 츠다 켄지로의 목소리 연기가 그를 상쇄하지만.
우리에게 ‘노다메 칸타빌레’의 ‘치아키 센빠이’로 유명한 타마키 히로시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극주부도’의 타츠는 만화를 실사화하며 더욱 풍성해진 이야기와 일본 대중매체 특유의 ‘병맛 개그코드’가 일품이다. 싱크로율은 츠다 켄지로에 살짝 못 미치는 감이 있다. 미쿠의 딸 히마와리 캐릭터나 타츠의 두목과 ‘누님’을 부부로 연결시키는 등 원작에는 없는 캐릭터와 설정이 등장한다. 이는 원작이 지닌 매력을 해치지 않는 선 정도다. 무엇보다 특유의 황당한 상황과 오버스러운 액션을 실사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두목을 맡은 타케나카 나오토와 누님 역의 이나모리 이즈미의 티키타카 연기를 보는 재미도 놓칠 수 없다.
‘극주부도’는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병맛 코미디’지만 킬링타임용으로 많은 이들에게 거부감이 없을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만화적 설정 때문에 일상에서 폭력적인 장면(실수투성이 마사가 타츠나 두목 등에게 걸핏하면 얻어터진다)이 자주 등장하는 등 눈살을 찌푸릴 부분이 있지만,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다면 넘어갈 만하다.
게다가 ‘극주부도’를 보며 키득키득 웃는 와중 새삼 전업주부의 길이 얼마나 넓고도 깊은지를 깨닫는 지점도 있다. 아직도 집안일을 ‘청소는 청소기가, 빨래는 세탁기가, 밥은 밥솥이 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다. 그러나 단순히 청소와 빨래와 요리를 하는 일이라면 주부와 가사도우미가 무엇이 다를까? 주부는 가사도우미와 달리 깊은 애정을 가지고 집안 전체와 가족들을 돌본다. 가족의 건강은 물론, 집안의 오늘과 내일의 미래를 계획하는 설계자이기도 하다.
츠다 켄지로가 연기한 원작 만화의 실사 CM.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며 실사화에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드라마 주연은 타마키 히로시로 돌아갔지만, 애니메이션 주연은 츠다 켄지로가 맡으면서 드라마와 애니를 비교해가며 보는 재미도 있다.
그러니 만화든 애니메이션이든 드라마든, ‘극주부도’는 주부를 얕잡아보는 여러 시선에 맞서 내 사람들을 지키는 협객의 마음으로 주부의 길을 걷는 타츠를 보여주며 진지하게 외치는 거다. “주부를 얕보지 마!”라고. 그나저나, 우리 집에도 타츠처럼 완벽한 주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미쿠처럼 밖에서 열심히 돈 벌어올 자신은 있는데 말이지.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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