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MBTI 유형 중 내가 속한 INTJ는 ‘남 연애사 듣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음’ ‘친구가 고민 상담하면 공감보단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해 줌’ 등의 특징이 거론되는 유형이다. 실제로 나는 남 연애사 듣는 게 고역이다. 남 연애사라는 게 결국 하소연 아니면 자랑질 중 하나인데, 하소연은 ‘답정너’일 때가 많고, 자랑질은 리액션에 약한 나를 어찌할 바 모르게 만든다. 다행인지 뭔지, 30대 중반이 넘으면서부터 주변에 연애사는 거의 사라지고(대신 배우자 푸념이 들어섰지만), 40대 들어서는 아예 전멸했다. 그렇게 연애라는 게 주변에서 사라진지 어언 몇 년, 어느 날 동생의 영업으로 ‘체인지 데이즈’(카카오TV)와 ‘돌싱글즈’(MBN)를 보게 됐다.
방송에서 소위 ‘짝짓기’,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적은 많았다. 고릿적 ‘사랑의 스튜디오’부터 ‘산장미팅-장미의 전쟁’ ‘강호동의 천생연분’ 같은 프로그램을 생각해 보라. 아니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성우의 내레이션이 맛깔 났던 ‘짝’이나 출연자들에 대한 관심이 폭풍 같았던 ‘하트시그널’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연애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는 것일 텐데, 나는 ‘짝’에 조금 흥미를 느낀 것 외에는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선남선녀, 청춘남녀끼리 모여 스파크 튀고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인데 굳이 그걸 내가 왜 봐야 하는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요즘 들어 비슷비슷한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독한 장치를 덧씌운 ‘마라맛’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내가 영업당한 ‘체인지 데이즈’와 ‘돌싱글즈’도 그랬고, ‘환승연애’(TVING) 같은 프로그램이 그렇다.
‘체인지 데이즈’는 사귀고 있지만 권태기에 놓인 커플들이 모여 한 숙소에서 일주일간 생활하며 기존 연인이 아닌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일주일의 여행이 끝나면 기존 연인을 선택할 수도, 헤어짐을 선택할 수도, 혹은 마음에 들었던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다. 연인이 있지만 합법적(?)으로 다른 사람과 데이트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정신적 스와핑’ 아니냐는 비난이 폭주한 바 있다. ‘환승연애’는 ‘체인지 데이즈’와는 달리 이미 헤어진 커플들이 모여 지나간 사랑을 되짚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는 콘셉트인데, 헤어진 이들이 한 집에 모여 다른 사람과 새로운 감정을 주고받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체인지 데이즈’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돌싱글즈’는 이혼은 했지만 확연히 솔로인 ‘돌싱’들이 나와 새로운 사람을 찾는 프로그램. 다만 새로운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헤어진 연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상흔을 남긴 전 배우자와의 비교가 불가피하다.
‘환승연애’는 짧은 클립으로만 봤지만 ‘체인지 데이즈’와 ‘돌싱글즈’는 전부 시청했다. ‘아니, 저런 프로그램을 왜 보는 거야’ 하면서 보기 시작했으나 어느덧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할 거야, 어떤 선택을 할 거냐고!’라고 속으로 외치는 내가 남았다. 공교롭게도 두 프로그램 모두 후일담을 다루는 마지막 방송만 남겨둔 상태(9월 9일 기준)로, 프로그램 내에서 출연자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이미 다 방영되었다. 논란의 선택도 있었고, 이해가지 않는 선택도 있었고, 안타까운 선택도 있었다. 앞서 말했듯 자고로 남의 연애사란 ‘답정너’거나 일방적일 때가 많아 함부로 훈수를 둘 수가 없다. 내 딴에는 건설적인 문제 해결 방안을 던지고 싶지만 연애의 당사자에겐 그 문제 해결 방안이란 것이 오지랖이요, 잔소리로만 들릴 수밖에 없으니까. 연애에, 사람의 감정에, 사람의 관계 형성이란 것에 정답이 있던가. 그래서 현실에선 고이 접어두는 오지랖을, 방송을 보면서는 열변을 토하며 부려보는 것이다. “아니야, 그 만남 아니야, 제발 넣어둬!” “정말 그 선택에 후회하지 않겠어? 지금이라도 헤어지는 게 나을 텐데” 등등 화면을 보며 맘껏 훈수 두고 주접을 부리는 재미, 이거 은근히 쏠쏠하다.
게다가 연애를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는 일이다 보니, 인간관계에 대해 곱씹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초미의 관심사는 ‘누가 누구와 이어지는가’겠지만, 이별의 기로에서 흔들리는 연인들의 모습을 다룬 ‘체인지 데이즈’나 크나큰 이별을 경험하고 그 흔적을 평생 기억해야 할 수도 있는 이들의 탐색을 다룬 ‘돌싱글즈’를 보다 보면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 인간에 대한 예의 같은 것들에 주목하게 되는 것. 남들 앞에서 자신들의 관계에 문제가 있음을 토로하며 눈물을 흘리는 연인을 보며 ‘니가 그렇게 울면 내가 좀 그렇잖아’라며 남들에게 깎이는 자신의 체면에 더 급급하는 연인의 모습이라든가(체인지 데이즈), 마음에 두었던 상대가 자녀를 키우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 전광석화처럼 다른 상대에게 호감을 돌리는 모습(돌싱글즈)처럼, 남이 보지 않는다면 나도 저 상황에 엇비슷하게 행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을 대하는 출연자의 태도를 보면서 나와 주변에 대해 곱씹어보게 되더라고.
마음과 예의를 담은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보여준다. ‘돌싱글즈’에서 ‘혹시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아이를 키우지 않는 다른 여성과 비교해) 마음이 달라진 게 아니냐’는 요지의 질문을 던진 여성에게 그 남자가 답한 대답은 100점짜리였다. “(키우든 키우지 않든) 엄마는 다 똑같아요”라며, 자녀가 있음을 섣부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다가갔다가 혹시라도 상황을 감당하지 못해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이 조심스럽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누가 호감가지 않겠는가 말이지. 마음에 두었던 상대가 자녀를 키우는 상태라는 것(그 외에 나이, 직업, 환경 등의 요인도 있었지만)에 부담을 느껴 재빨리 다른 상대로 급선회했던 또 다른 출연자가, 저 남자의 대답만큼은 아니더라도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더라면 훨씬 호감을 살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체인지 데이즈’도 마찬가지. 10년간 이별과 만남을 번복하는 장수 커플의 경우, 서로를 너무 알고 친근한 나머지 더 독하고 거센 말을 퍼붓는 모습을 보이며 안타까움을 야기했다. ‘왜 저런 말을 할까’ 싶다가도, 나도 내 가족이나 친구에게 그럴 때가 있음을 반성하게 된달까.
‘체인지 데이즈’와 ‘돌싱글즈’는 ‘마라맛’ 설정을 입고 뜨거운 인기를 얻었고, 시즌2 제작도 확정되었다. 연애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재미가 있지만, 인간과 관계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 부분도 꽤 크니 시간 나면 시청을 추천한다. 넷플릭스(체인지 데이즈, 돌싱글즈), 왓챠(돌싱글즈), 티빙(환승연애, 돌싱글즈), 카카오TV(체인지 데이즈) 등에서 볼 수 있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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