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1970년대 대규모 경제 개발 계획과 맞물리며 호황을 누리던 한일그룹은 단일품목 최초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고 국내 섬유 40%를 생산할 정도로 섬유업계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한 기업이었다. 한일그룹은 1976년 2만 7000여 명의 사원을 두고 마산시(현 마산합포구)의 지역 경제를 선도했지만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며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한일그룹의 몰락은 당시 마산시뿐 아니라 인근 지역 경제에 큰 파장을 남길 정도였다.
#섬유업 외길 걸어 일군 한일그룹
한일그룹의 모태인 한일합섬은 1922년생인 김한수 씨가 설립했다. 15세에 일본 유학길에 오른 김한수 씨는 고노하나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오사카의 한 포목점에 취직해 일을 배웠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으로 돌아와 부산에서 포목점을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김한수 씨는 1954년 양복지 수입 업체인 대경산업 설립을 시작으로 1956년 경남모직, 1962년 중앙합성섬유 등을 세워 섬유업을 영위했다. 이후 1964년 마산에 설립한 한일합성섬유가 한일그룹의 시초가 된다.
김한수 창업주는 1967년 일산에 22만 톤 규모의 아크릴제조 공장, 1969년 구로에 염색공장, 1973년 양구에 스웨터공장을 세웠고,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에 힘입어 급속 성장했다. 한일합성섬유는 설립 9년 만인 1973년 단일 품목 최초로 1억 달러 수출을 기록했고 그해 11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1억 불 수출의 탑’을 처음으로 수상했다. 당시 우리나라 수출액은 33억 달러 정도였다.
김한수 창업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섬유업 위주 사업을 지속해서 벌였다. 1974년 기업공개를 통해 한일합섬을 상장하고 1975년 대구와 수원에 합섬방정공장을 설립했고, 1976년 대원봉제(주)를 설립해 사업을 확장했다. 이 와중에 공장 준공이 빈번해지자 (주)한효건설, (주)한효개발을 설립해 직접 공장을 지었다.
김한수 창업주는 1970년 동서섬유화학, 1974년 부국증권을 인수해 화학산업과 금융업에도 진출하는 등 사업다각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두 개를 인수하는 데 그쳤고 그룹의 매출은 섬유업에 치중된 형태를 보였다.
1979년 김한수 창업주는 장남 김중원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킨 후 경영에서 물러났다. 1982년 김한수 창업주가 사망할 때까지 한일그룹은 섬유업 위주 성장이 지속됐다. 이후 김중원 사장은 그룹을 이끌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섬유업 중심 사업 탈피하고자 노력한 김중원 사장
김중원 사장은 섬유업에 치중된 사업을 다각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6년 국제그룹이 몰락하며 여러 계열사들이 시장에 나왔고 김중원 사장은 국제상사의 신발 부문, 무역 부문, 남주개발, 원효개발, 연합물산, 국제그룹 용산 본사를 인수했다.
당시 인수한 국제그룹 계열사 규모는 4521억 원, 한일그룹의 매출액은 6320억 원이었다. 한일그룹은 국제그룹 계열사 인수를 통해 순식간에 1조 원대 기업으로 성장한다.
이를 시작으로 1987년 복합비료 생산 공기업인 진해화학, 1989년 동방호산개발을 인수했고, 한일합섬그룹을 한일그룹으로 바꾸며 종합그룹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섬유업이 그룹에서 차지하는 매출 비율을 50% 아래로 낮추기 위해 관광업, 제약 및 생물공학 분야 등에도 진출한다.
1988년 6월 부산 하얏트호텔 개관을 시작으로 제주도 등 주요 관광지에 레저타운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1991년 한일합섬의 출자로 한효과학기술연구원을 설립해 항암제 등의 신약 개발에 나섰다. 1992년 2월 신라투자금융(한일투자금융)을 인수해 금융업도 강화했다.
하지만 1987년부터 노동운동의 급성장과 함께 임금이 상승했고 이에 노동력 위주 섬유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됐다. 한일그룹도 예외일 순 없었다. 결국 인도네시아에 생산라인 5개를 이전해 국내에는 2개만 유지하게 된다. 이 여파로 한일합섬의 매출도 지속해서 하락했다. 그룹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던 한일합섬은 1993년 63억 원의 흑자를 기록한 후 적자로 전환했다. 국제그룹 계열사 인수에 따른 금융비용도 한일그룹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1995년 4월 김중원 회장은 경남모직, 부국증권, 한효개발, 한효건설 등 4개사를 동생들에게 넘겨주고 연합물산, 한일투자금융, 신라금융 등을 매각해 계열사를 7개로 줄여 재무건전성 강화에 힘썼다. 하지만 사업다각화를 통해 눈에 보일 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고 주력 사업인 섬유업의 쇠퇴로 그룹은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1995년 재계 순위 20위였던 한일그룹은 1996년 27위로 급락했고 1198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룹 전체의 부채비율은 563%에 달했으며 금융비용 부담률도 13.6%로 진로그룹과 삼미그룹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다. 김중원 회장은 이 상황에 우성건설을 인수하는 악수를 둔다. 여기에 외환위기가 겹치며 결국 1998년 한일그룹은 부도를 맞았다.
주력 기업 한일합섬은 동양그룹을 거쳐 유진그룹에 넘어간 후 재분사되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경남모직, 국제상사는 각각 고려GMB와 LS그룹으로 넘어갔으며 나머지 기업들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폐업했다.
김중원 전 회장은 국제상사가 허위로 재무제표를 작성해 막대한 피해를 입힌 혐의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휘말려 해외로 도피했고 2020년 1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다.
정동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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