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다. 평일 오전이었지만 검진 센터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검진 후 식당에 들러 덮밥을 먹은 뒤 친구 집에 이동해 ‘치맥’을 즐겼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지하철을 이용했다. 퇴근시간대라 사람들 속에 낑겨 돌아와야 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7월 6일, 6개월여 만에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1000명을 넘어 1212명을 기록한 날이었다. 그날 내가 스친 근접거리의 사람은 얼마나 많았던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5인 집합금지 해제 이야기가 나오던 터라 입 안이 썼다. 왓챠 익스클루시브로 단독 공개된 ‘안나: 죽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그 쓴맛은 더해졌다.
‘안나: 죽지 않는 아이들’의 배경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어른들만 죽이는 바이러스가 생겼고, 바이러스의 대유행 끝에 결국 아이들만 남았다. 엄마를 잃고 동생 ‘아스토르’를 돌보며 살아온 ‘안나’는 오늘도 먹거리를 찾아 헤맨다. 원하는 물건이 있어도 그와 교환할 만한 물건이 없으면 거래가 성립되지 않는다. 안나나 강가에서 살고 있는 ‘피에트로’처럼 각자도생으로 사는 아이들도 있지만, 약한 아이들을 습격하는 등 무리를 지어 사는 ‘파란 아이들’이라는 조직도 있다. 어쨌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살아남는 것이다. 문제는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끝이 아니라는 것. 아이들 또한 언젠가는 자라서 어른이 된다. 바이러스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이들이 ‘홍열’이라 부르는 바이러스 또한 그 몸 안에서 자라나 어른이 된 아이를 죽인다. 결국 살아남은 아이들은 모두 시한부 인생인 셈이다.
아직 생리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제법 성숙한 티가 나는 안나도 이 시한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연히 만난 피에트로와 강가에서 함께 수영을 하며 주고받는 눈길만 봐도 이 소녀가 어린아이를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와중 안나의 동생 아스토르가 ‘파란 아이들’에게 잡혀간 것. 안나는 동생을 찾으러 ‘파란 아이들’ 무리를 찾아 나선다.
‘안나: 죽지 않는 아이들’은 세계 종말을 테마로 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 Apocalypse)물이지만 주인공들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란 점에서 한층 종잡을 수 없다. 아이들만 있다고 해서 성인 대상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물보다 수위가 낮다고 생각하는 건 금물. 안나를 잡아들여 애완견이나 노예처럼 부리려 했던 잡화점 쌍둥이 소년 ‘파울로’의 잔혹함, 목표를 잡으면 사생결단으로 쫓는 ‘파란 아이들’ 무리의 집요함, ‘파란 아이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의 목숨을 빼앗는 ‘안젤리카’의 무자비함 등 ‘안나: 죽지 않는 아이들’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어른 뺨치는 가학적인 면모를 보인다. 물론 다른 아이들을 학대하는 파울로나 안젤리카 같은 경우 사춘기를 맞은, 신체적으로 어른에 가까워지는 시기다. 어린아이들이 더 큰 아이들에게 맹목적인 복종을 하며 선악을 구별 못하는 잔혹함을 보인다면, 파울로나 안젤리카의 잔혹함은 선천적으로 보이는 악한 본성에 어른의 잔혹함이 더해진 느낌.
‘안나: 죽지 않는 아이들’이 그리는 세계는 전형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물보다 한층 더 암울하다. 아이들만 살아남았지만 이들 또한 어른이 되면 바이러스로 죽을 운명이다. 어른이 없으니 당연히 새로운 아이들 또한 태어날 리 만무하고. 죽음을 앞둔 아이들이 한층 잔혹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문명의 제재가 사라진 무인도에서 소년들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표현했던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처럼, ‘안나: 죽지 않는 아이들’에서도 권력을 쥔 아이들은 한껏 잔혹해진다.
‘안나: 죽지 않는 아이들’은 니콜로 암마니티가 쓴 2015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상한 바이러스가 발발하고, 격리와 백신 등에 대해 뉴스에서 이야기하며, 초기에 노인들 위주로 사망하는 바이러스라고 알려진 점 등 여러모로 지금의 코로나19 시대와 흡사한 장면을 보여 시선을 잡아채는 드라마다. 1시즌 6화로 구성됐는데, ‘촬영 시작 6개월 후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됐다’라고 나오는 초반 문구를 보면 어쩐지 섬뜩할 정도. 코로나19는 전 세계적인 상황이고 아직 문명은 굳건하지만, 1년 반 동안 우리는 정체 모르는 바이러스 앞에서 종종 비이성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해왔다. 이 사태가 좀 더 장기화되고 법과 사회 질서가 살짝 무너진다면, 과연 우리는 ‘안나: 죽지 않는 아이들’ 속 세계처럼 되지 않으란 법이 있을까?
1시즌 끝에서 안나는 동생과 함께 어른이 되어도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하고자 시칠리아 섬을 벗어나 이탈리아 본토로 향한다. 천신만고 끝에 망망대해에서 발견한 커다란 군함에서 그들은 뜻하지 않은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군함은 안나와 아스토르에게 노아의 방주가 될까? 아이들은 죽지 않고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원작에서 상상한 독특한 아이들만의 세계, 2000: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된 주인공 안나 역의 줄리아 드라고토의 빼어난 연기, 에트나 화산의 일출처럼 시칠리아 곳곳을 담아낸 아름다운 풍경,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애니메이션을 섞은 독특한 연출 등 ‘안나: 죽지 않는 아이들’의 매력은 1시즌의 엔딩이 불러 일으키는 궁금증과 섞여 2시즌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킨다. 부디 2시즌이 방영될 때는 코로나19가 더 이상 기승을 부리지 못하는 때이길 바라며, 모두들 당분간 ‘집콕’ 하면서 이 드라마를 달려 봅시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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