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넷플릭스 안에서 하염없이 서성거리며 뭘 볼까 망설이고 있었다.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방대한 OTT 플랫폼에선 콘텐츠마다 자길 봐 달라고 그 존재감을 내뿜으려 하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다. 여기서만 볼 수 있다는 둥, 지금 가장 많이 보는 콘텐츠라는 둥, 무슨 수상작이라는 둥. 내 취향에 쏙 맞춰서 컬렉션했다고 자신만만해하기도 하고, 썸네일을 바꿔가며 새로운 인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 와중 언젠가부터 눈길을 끌었던 게 넷플릭스의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이다. 썸네일부터 잔잔한 이 드라마는 2013년 방영된 4부작의 짧은 콘텐츠지만, 어딘가 지쳐 있는 나를 달래기에 무척 맞춤한 작품이다.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이하 ‘빵과 스프, 고양이’)의 스토리라인은 단순하다. 출판사에서 베테랑 편집자로 일하던 주인공 아키코(고바야시 사토미)가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어머니가 40년 동안 운영하던 가게를 리모델링해 샌드위치와 스프를 파는 런치식당을 운영하는 모습을 담았다. 이 설명 외에 다른 게 없는 게, 정말 딱 이 외에 특별한 서사가 없다. 출생의 비밀이 있나 싶지만 ‘내가 네 아빠다’ 같은 드라마틱한 고백이 없고, 이웃에서 가게를 하는 할머니 사장님이 좀 까칠한가 싶지만 머리채를 쥐어 잡는 ‘마라맛 진행’도 없다. 그 흔한 애정 전선도 없다. 그저 아키코는 가게를 열고 아르바이트생과 함께 손님들에게 샌드위치와 스프를 팔며, 이웃들과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 우연히 길에서 주은 고양이를 돌보며 살아간다. 얼핏 다큐멘터리 같을 정도로 평범하고 평온한 일상을 담았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이 작품을 선택한 것엔 그 평범하고 평온한 일상이 무척 쉽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에 지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드로메다급 마라맛 진행’이 판을 치는 요즘 콘텐츠 사이에서 ‘빵과 스프, 고양이’는 물처럼 밍밍한 맛일 터이다. 하지만 마라탕은 안 먹고 살아도 물은 안 먹고 못 사니까. 나이가 들어가서인지 몰라도, 주변에서도 드라마나 영화 추천을 부탁하며 슬슬 이렇게 묻는다. “뭐 무해하고 평온한 거 없어?” 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재미있고 강렬하고 흡인력 쩌는 것’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텐데.
‘빵과 스프, 고양이’는 단순하고 평온하지만, 그 안에서 부러움의 요소가 여럿이다. 수십 년간 자란 고즈넉한 동네의 분위기, 다감하지만 섣불리 선을 넘지 않고 지켜봐 주는 이웃들의 정, 작은 것의 변화도 알아보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씨 등이 그러하다. 물론 이건 주인공인 아키코 또한 그러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 같은 경우, 복도식 아파트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무례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이웃의 할머니가 불편하고 짜증나 애써 시선을 외면한다. 아마 아키코라면 먼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겠지. 나는 섣불리 인사를 건넸다가 돌아올지도 모를 친근을 빌미 삼은 오지랖이 두려워 소통을 차단하는 부류인데, 아키코는 친근하되 자신의 선을 온화하고도 분명하게 밝히는 캐릭터다. 물론 아키코의 이웃들도 자신의 의견을 내놓긴 하지만 그걸 강제하기는커녕 쉬이 충고하려 들지 않지만.
이 작품의 분위기는 평온하지만 굉장히 평온해 보이는 주인공의 내면은 스스로 말하듯 ‘수행’하는 것과 가깝다. 그 어떤 행복한 삶도, 괴로운 삶도 결국 수행의 길을 걷듯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아키코 또한 그러하다. 갑작스레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남들이 놀랄 만큼 담담했던 아키코였지만 여러모로 어머니와의 삶이 불편했고 그래서 가까이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함을 알게 되고, 평생 편집을 하며 노련한 위치에 올랐으나 나이 때문에 좌천에 가까운 인사를 제의받기도 하며, 존재조차 몰랐던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복동생은 가까운 동네의 작은 절에서 스님으로 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 잔잔한 물결 같은 삶으로 보이지만 누구나 그렇듯 거대한 바다의 삶이 존재한다. 그 안에서 아키코는 어머니와는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차분히 걸어간다.
무엇보다 ‘빵과 스프, 고양이’는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따스한 매일의 식사를 매개로 잔잔하지만 오래가는 위로를 주는 작품이다. 편집자일 때부터 가까운 이들에게 계란샌드위치 등 소소한 음식을 해주던 것으로 보이던 아키코가 손님들에게 파는 음식은 평범한 샌드위치와 수프다. 여러 가지 채소를 푹 끓여내,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절로 연상된다. 계란을 풀어 몽글몽글 지져 내고, 햄과 채소들을 정갈하게 썰어 만드는 샌드위치도 침샘을 고이게 만든다. 아키코의 가게뿐 아니라 맞은편 해피 찻집 사장(모타이 마사코)이 선보이는 나폴리탄이나 오므라이스도 마찬가지. 화려하지 않은 메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정감이 가는, 엄마가 부쳐주는 감자전이나 닭죽같이 보드랍고도 정성이 깃든 음식들이 우리를 힐링시키는 느낌이다.
주인공을 맡은 고바야시 사토미는 물론 조연진으로 모타이 마사코, 미츠이시 켄, 이치카와 미카코, 그리고 카세 료 같은 배우들이 출연하기에 연상되는 영화들이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카모메 식당’을 비롯해 ‘안경’ ‘마더 워터’ ‘도쿄 오아시스’ ‘산의 톰씨’ 같은 영화들. ‘빵과 스프, 고양이’의 원작 소설 저자가 ‘카모메 식당’의 원작 소설 저자인 무레 요코인 때문도 있고, 겹치는 출연진과 제작진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모메 식당’의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의 분위기와 닮았지만 묘하게 다른 마츠모토 카나 감독이 ‘마더 워터’ ‘도쿄 오아시스’에 이어 선보인 ‘빵과 스프, 고양이’. 문득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빵과 스프, 고양이’를 권한다. 드라마를 보고 난 뒤, 냉장고를 뒤져 나오는 재료들로 간단한 음식이라도 만들어 보시라. 서툴게 칼질을 하고, 썰고, 다지고, 볶고, 끓인 뒤 완성된 음식을 마주할 때면 그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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