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천재의 삶은 어떨까. 천재라는 기준 자체가 애매하지만, 어쨌든 흔히 한 분야에서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지는 언제나 흥미의 대상이다. 특히 문화예술 분야의 천재들은, 이공계 분야의 천재들과 다르게 어느 정도 방종하고 방탕할 자유가 주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긴 모범적인 천재라는 말처럼 말이 안 되는 말이 또 어딨겠나. 모차르트나 살바도르 달리가 칸트처럼 규칙적으로 산책하고 일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여전히 그들은 천재겠지만 어쩐지 흥미가 덜한 것은 사실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홀스턴’은 1970년대 미국 패션의 아이콘이던 디자이너 로이 홀스턴의 이야기를 담았다. 홀스턴의 삶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천재의 삶과 무척 닮아 있다. 패션 디자이너인 만큼 화려하기는 어마무지하게 화려하며, 방종하고 방탕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홀스턴 왕국이라 할 만한 브랜드를 만들며 화려하게 타올랐고, 그랬던 만큼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몰락을 맞았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흥망성쇠요, 불꽃 같은 삶이다.
홀스턴이란 이름은 못 들어봤어도 아마 그가 디자인한 울트라 스웨이드 랩드레스, 혹은 하트만 여행 가방은 보면 알 것이다. 아니면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 때 영부인이던 재클린 케네디가 썼던 모자라든가. 재클린 케네디의 모자로 홀스턴은 명성을 얻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자 시장은 작았다. 미국 패션의 역사를 바꿔 놓고 싶던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여느 예술가들이 그렇듯 자금. 돈 많은 재력가들, 재력가들의 부인들에게 ‘해가 서쪽으로 뜬다고 믿을 법하게’ 영업을 펼치고, 결국 그는 한 사업가와 제휴를 맺으며 ‘큰 물’로 나선다. 옷뿐 아니라 가방, 가구, 향수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이 모두 그에게서 나와 ‘홀스턴’이란 거대한 왕국의 주춧돌이 되어 주었다.
성공하여 왕으로 군림하는 자에게 어울리는 건 파티일 것이다. 앤디 워홀에게 팩토리가 있었듯, 홀스턴에겐 뉴욕의 나이트클럽 ‘스튜디오 54’가 있었다. 언제나 홀스턴과 함께하는 화려한 동료들이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로 유명한 주디 갈란드의 딸이자 아카데미, 골든글러브, 토니상을 수상한 배우 겸 뮤지컬 배우 라이자 미넬리, 오픈하트 목걸이 같은 티파니의 유명한 제품을 남긴 모델 출신 디자이너 엘사 페레티 등 홀스턴의 뮤즈도 있었다. 질펀한 쾌락을 즐기는 동성 연인들도 있었고, 난초와 담배와 코카인이 언제나 그의 곁을 지켰다. 2주일분 코카인을 하루 만에 동낼 만큼 홀스턴과 홀스턴의 친구들은 끝을 모르고 향락을 즐겼다. 그렇지만 열흘 붉은 꽃은 없다고, 결국 끝은 왔다. 어쩌면 향락 외에도 홀스턴 자신의 오만과 독선,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길 줄 모르는 태도가 그의 끝을 한층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홀스턴의 몰락은 예견돼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디자인, 새로운 콘텐츠가 나타나는 패션계에서 잠시라도 정체되어 있는 것은 몰락의 시작이니까. 또한 예술과 사업 사이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고집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는 것도 몰락을 부추긴 것일 수밖에 없다. 패션을 예술로 여긴 홀스턴의 의지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천재라고 사업까지 잘할 순 없는 노릇. 그와 사업 제휴를 맺었던 데이비드 마호니의 제안도, 절친한 동료의 충고도 그는 듣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조금만 덜 오만했고,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면 몰락했더라도 그의 친구들은 남아 있었을 수 있다. 아니면 그의 이름이라도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만드는 데는 열심이었으나 그 브랜드를 지키는 데는 소홀했던 홀스턴은 이후 자신의 이름을 넘기는 대가(라이선스 계약)로 말년까지 경제적으로는 잘 살았다. 그러나 이름을 빼앗긴 디자이너가 과연 그 이후 행복했을까? 홀스턴 브랜드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누구도 그 브랜드에서 예전 같은 영광을 감지하지 못한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랬는데, 홀스턴은 지속적인 부를 받는 대신 이름을 남기는 영광을 잃었다.
‘홀스턴’은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스러지고 만 천재 디자이너 홀스턴의 생애를 5개의 에피소드로 집약적으로 담아낸다. 실존했던 인물들의 이야기인 데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세계를 그려낸 만큼 드라마 자체도 화려하고, 노골적이다. 홀스턴이 동성 연인과 질펀하게 즐기는 섹스 장면이나 수시로 흡연과 코카인을 하는 인물들의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인물을 표현하는 배우가 이완 맥그리거이기에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볼 수 있다. 30대 이상에게 ‘트레인스포팅’ ‘물랑루즈’ ‘아일랜드’ 그리고 ‘스타워즈’의 오비완 케노비로 잘 알려져 있는 이완 맥그리거는 ‘홀스턴’에서 오만하되 불안정한 천재의 모습을 맞춤옷처럼 잘 소화해냈다. 라이자 미넬리 역의 크리스타 로드리게즈, 엘사 페레티 역의 레베카 다얀도 인상적이고, 드라마 속 의상과 인테리어 등도 1970년대에서 튀어나온 듯 사실적이다.
무엇보다 남들보다 특별한 천재의 삶을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천재이고 싶지만 천재의 삶을 감당할 자신도 없는 범인의 대리만족을, ‘홀스턴’에서 느낄 수 있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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