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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국제그룹 인수한 극동건설그룹의 '패착'

경영난, 화재 등 위기 겪으며 그룹 유지했지만, 국제상사 등 부실 계열사 인수와 외환위기로 좌초

2021.06.02(Wed) 18:09:24

[비즈한국] 6·25전쟁 직후 복구 작업으로 인한 건설경기 호황과 중동개발 붐을 타고 성장한 극동건설은 1970년대 현대건설, 대림산업, 삼부토건, 동아건설과 함께 ‘건설 5인방’으로 불리며 건설업계를 호령했다. 유명세를 떨치던 극동건설은 해체된 국제그룹 계열사를 인수하며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고, 외환위기를 겪으며 사세 축소와 함께 주인이 3번 바뀌는 불운을 겪었다.

 

#복구 사업 호황과 중동 개발 덕에 고속 성장한 극동건설

 

1922년생인 김용산 창업주는 1947년 25세의 나이에 대영건설사를 설립해 건설업에 진출했고, 6년 후인 1953년 극동건설 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했다. 6.25전쟁 직후 건설업계는 호황기를 맞았다. 산업시설, 건물, 주택들이 절반 이상 파괴됐기 때문이다. 전쟁 복구를 통해 대부분의 건설사들이 성장 자금을 마련했고, 극동건설도 그 중 하나였다.

 

1972년 5월 대연각호텔 실화사건 종합공판에 나온 김용산 대연각호텔 사장(맨 왼쪽)과 관련 피고들. 사진=연합뉴스


김용산 창업주는 1965년 해운대에 극동호텔을 건축하며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극동호텔의 규모가 서울의 워커힐호텔 다음으로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동건설이 영업난을 겪으며 완공한 지 2년 만인 1967년 10월 동아대학교재단에 극동호텔을 매각한다.

 

김용산 회장은 개의치 않고 곧바로 총공사비 21억 원을 투입해 ‘대연각’ 건축에 나섰다.  1969년 1월 완공된 지하 2층~지상 21층 규모로 서울특별시 중구에 세워진 대연각은 당시 몇 안 되는 초고층 빌딩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대연각을 완공한 기쁨도 잠시. 1971년 12월 대연각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총 사망자 166명, 부상자 68명, 실종자 25명을 기록했다. 당시 기준으로 8억 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한 세계 최대 화재 사고 중 하나다. 옥외 비상구를 비롯한 안전장치가 전무했을 뿐만 아니라 빌딩의 내장재마저 가연성 물질로 가득해 1층에서 발생한 화재가 21층까지 번지는데 1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극동건설은 초고층 호텔인 대연각을 지으며 건설 시장에서 다시 두각을 나타냈고, 직접 지분까지 출자해 지었지만 화재로 인해 존폐 위기까지 몰렸다. 하지만 1970년 중반 중동지역에서 일어난 건설 붐과 1969년부터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서울지하철 1호선, 남양방조제 등 정부 발주 공사를 수주하며 재기에 성공한다.

 

하지만 1981년 이후 유가 하락과 공사 발주량 감소로 중동 붐이 꺼졌다. 재벌그룹 중심으로 건설사가 재편되면서 극동건설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1990년에 들어서 현대건설, 동아건설 대우건설 등 굵직한 건설사들의 도급액이 2조~2조 7000억 원에 달했지만 극동건설은 4722억 원에 불과했다.

 

#국제그룹 계열사 인수와 맞닿은 몰락

 

본업인 건설업에서 여러 굴곡을 겪으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극동건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전두환 정권의 산업합리화 정책에 따라 거대 기업이던 국제그룹의 급격한 해체가 이뤄지자, 1986년 9월 극동건설이 국제그룹의 계열사이던 동서증권과 (주)동서경제연구소, 국제상사의 건설부문을 인수하게 된다. 1984년 국제그룹이 해체되기 전 국제상사의 도급액 순위는 9위였다. 건설업과 금융업을 아우르며 극동건설이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극동건설그룹은 1988년 2월부터 동서투자자문, 동서창업투자, 동서할부금융 등 5개사를 설립해 금융업에서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하지만 극동건설의 도급 순위는 1984년 10위에서 점차 하락해 1995년 27위까지 내려갔고, 9위였던 국제상사도 50위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밀려난 이유 중 하나는 중동 붐이 꺼지며 발생한 부실 채권액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극동건설이 인수할 당시 국제상사의 부채액은 2800억 원이었다. 극동건설이 1400억 원의 빚만 떠안는 조건으로 인수했지만 숨겨진 부채액이 더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11월 10일 대검에 출두한 김용산 극동 회장. 사진=연합뉴스


다행히 함께 인수했던 동서증권이 점포 83개, 2조 7000억 원의 자산을 보유한 국내 4위 대형 증권사로 성장하며 그룹의 버팀목이 됐다. 극동건설에 회사채 지급보증과 여러 방식으로 2400억 원을 빌려주며 그룹의 현금 유동성을 확보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인한 주가 폭락으로 동서증권의 부채 규모가 급증하며 휘청거렸다. 극동건설그룹 경영 위기설이 퍼짐과 동시에 동서증권이 증시 여건에 따라 2조 원의 주식을 매각한다는 방침이 나오며 고객들의 불안은 극에 달했고, 예탁금 인출 사태가 발생한다. 하루 700억 원 상당의 고객예탁금이 인출되기도 했다. 당시 걷잡을 수 없던 인출사태에 동서증권은 1개월간 영업중지 신고를 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이 사태를 막지 못하고 1998년 극동건설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유동성 위기를 불러왔던 국제종합건설은 여러 기업을 거친 후 2011년 대명그룹에 매각돼 대명코퍼레이션으로 사명이 바뀌었고, 동서증권은 청산법인 동산호라이즌증권으로 껍데기만 유지하다가 2017년 소멸됐다. 대부분의 계열사들도 폐업 등으로 사라졌다.

 

극동건설은 법정관리 후 2003년 미국의 사모펀드 기업인 론스타에 1700억 원에 매각됐고, 상장폐지 해 비상장 기업으로 바뀌었다. 2007년 웅진그룹이 건설사 진출을 위해 극동건설을 6600억 원에 매입한다. 하지만 인수 직후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으로 세계적인 금융 위기가 찾아오면서 건설경기 침체는 날로 악화돼 2012년 9월 법정관리를 받게 된다. 이후 중소 건설사인 세운건설에 인수돼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2006년 6월 김용산 전 극동건설 창업주는 허위 재무제표 작성 및 1200억 원 사기대출 등의 혐의와 1442억 원 계열사 부당지원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개월 복역 후 8·15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고, 약 1년 후인 2007년 7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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