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업들은 때론 돈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을 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법이나 제도를 알면 더욱 자세한 내막을 이해할 수 있다. 새로 시작하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비즈니스 법률’은 비즈니스 흐름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를 소개한다.
담합이 적발되면 기업에 타격이 적지 않다. 담합 사업자는 담합으로 얻은 이익을 고스란히 반환하는 것에 더해 추가적인 제재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제도가 그렇다.
주요 제재로는 △공정위의 과징금 △발주처의 부정당업자 제재 △수요기관의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형사처벌 등이 있다. 이미지 하락 등 무형의 제재도 무시할 수 없다.
최근 수요기관이 제기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사건에서 다수의 판결이 선고됐다. 4대강 살리기 사업, 호남고속철도 사업, 원주·강릉 고속철도 사업, LNG가스기지/주배관 사업 등 주요 국책사업은 2010년 전후 집중적으로 발주됐고 담합도 그 시기에 있었다. 그러나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 공정위 처분에 대한 행정소송 등으로 시간을 끌다가 이제야 민사사건에서 판결이 선고됐다.
담합 손해액은 담합가격과 담합이 없었으면 형성됐을 가상의 경쟁가격 간 차액으로 계산된다. 그런데 위에 열거된 굵직굵직한 사업의 계약금액 자체가 수천억 원에 이르는 등 워낙 크다 보니 그 차액이 계약금액 대비 1~2%에 그치더라도 손해액이 수십, 수백억 원에 이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어떻게 하면 손해액을 줄일 수 있을지, 즉 책임제한사유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현재 소송에서 주로 언급되는 내용을 살펴본다.
담합 손해배상 사건에서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은 ‘공평의 이념상 고의로 불법행위를 저지른 자가 피해자의 부주의를 이유로 책임을 감해 달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판례다. 이에 따르면 담합 역시 고의의 불법행위이므로 책임제한 여지가 없다.
이 때문에 이러한 판례를 회피하기 위해 즉, 공평의 이념에 반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책임제한사유를 개발하기보다는 기존의 판결상 언급된 사정을 발굴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판례에 따르면 원고가 피고들의 담합행위로 인해 입은 손해 중 일부를 소비자에게 전가했을 가능성이 있으면 손해배상 책임이 감경된다. 이른바 밀가루 가격 담합 사건에서 대법원은 밀가루 회사의 장려금 지급을 실질적인 밀가루 가격 할인으로 보아 손해액을 제한한 원심의 판결이 적법하다고 봤다(2010다93790). 또 서울고법은 인천광역시가 지하철 요금을 통해 지하철 이용자에게 손해를 전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건설사들의 손해액을 제한했다(2015나10143).
발주처 또는 수요기관이 담합을 유도했거나 방치한 때도 손해액 제한이 인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고법은 약품도매상들이 간염백신 입찰에서 담합한 사안에서 입찰담합이 발생한 원인은 약품도매상으로 하여금 제약회사의 통제를 받도록 함으로써 가격 균일화를 유도한 것에 있으므로, 약품도매상들이 배상해야 할 손해액은 제한돼야 한다고 판단했다(97나4465).
이와 관련해 건설담합 사건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것이 ‘1사 1공구제’다. 1사 1공구제란 단일 사업의 공사구역을 여러 개로 나눠 발주하면서 1개 건설사가 1개 공구만 수주하도록 하는 제도다.
소수 사업자가 사업 전체를 독식하는 것을 방지하고, 준공기일을 지키는 데 필요하다는 점에서 도입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가령 현실적으로 공사를 수행할 수 있는 건설사가 10개뿐인데 10개 공구로 분할 발주한 경우, 건설사 입장에서는 굳이 중복 공구를 선택해 경쟁하기보다는 공구를 서로 나눠 가져가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1사 1공구제는 담합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이 때문에 1사 1공구제는 2015년 전면 폐지됐다. 이러한 배경에서 1사 1공구제 공사에서는 어김없이 책임제한 주장이 이어지게 된다.
담합 사업자들이 공정위로부터 막대한 액수의 과징금 납부명령을 받고, 발주처로부터 부정당업자 제제처분을 받은 경우 이를 이유로 한 손해액 제한을 인정한 판결도 있다. 서울고법은 공정위의 과징금 100억 원에 달하고 부정당업자 제재처분으로 3년간 공공입찰에 참가하지 못한 사안에서 손해액 제한을 인정했다(2017나2046654).
그밖에 담합과 관련된 사업을 폐지하는 등 담합으로 얻은 이익이 크지 않았다고 볼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도 책임제한사유로 고려될 수 있다. 무인교통 감시장치 사업의 경우 발주처가 대부분 공공기관이고 원가 대부분이 인건비인 탓에 이윤이 크지 않았다. 실제로 다수의 사업자가 적자가 발생하여 사업에서 철수했는데 이러한 사정이 반영돼 관련 민사소송에서 손해액 제한이 인정됐다(서울고법 2015나2017546).
여기에서 책임제한사유 중 중요한 것 하나가 빠졌다. 손해액을 산정하는 감정 결과 자체를 공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감정인이 채택한 손해 산정 방식 자체가 불합리하다거나, 통계학적 추정 방식을 통해 손해액을 산정하면서 비교·대조군이 잘못 확정됐다거나 비용 등 각종 요소가 빠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일단 감정 결과가 나와 봐야 반박이 가능한 내용이므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논리를 추출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감정에는 수천만 원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지엽적인 사정을 들어 감정 결과를 주장하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되거니와 소송 안팎의 눈초리도 곱지 못하다. 이는 최초 감정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재감정, 추가감정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다. 담합이 인정돼 손해배상 청구까지 당했다면 상황이 나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최소한 위에 열거된 사정 정도는 주장해봐야 하지 않을까.
정양훈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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