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1920년 초등학교만 졸업한 15세 청년은 가난이 싫어 무일푼으로 부산에 가서 5년 동안 목공일을 배웠다. 뛰어난 손재주 덕에 5년 만에 부산을 대표하는 목공수로 자리 잡은 강석진는 그동안 번 돈으로 1925년 동명목재를 설립했다. 뛰어난 손재주와 사업수완 덕에 사업은 번창했고, 40년 만에 재계 1위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동명그룹의 신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강석진 회장이 전두환 정권 눈 밖에 나 악덕 기업주로 몰렸고, 1980년 6월 동명그룹은 해체된다. 당시 동명그룹의 파산으로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졌고 부산 경제가 휘청일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작업장 구석에서 생활하며 배운 ‘목공’
강석진 동명그룹 창업주는 1905년생으로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제 강점기에 소송에 얽혀 순식간에 가난해졌다. 친척들 집을 전전하던 그는 15세에 보통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돈을 벌겠다는 신념 하나로 대도시인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 도착해 일자리를 찾다가 한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구점에 연이 닿아 심부름꾼 겸 목공 견습생으로 일을 배우게 된다. 작업장 구석에서 생활하며 일을 배운 그는 5년 만에 부산 대표 목공수로 이름을 알렸다. 강석진 창업주는 5년 동안 꾸준히 모은 돈으로 10평 남짓한 동명제재소를 열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강석진 창업주의 제재소는 품질 좋은 목재로 튼튼한 가구를 만들며 점차 유명해졌다.
1940년대에 사업을 하며 번 돈으로 부산 동구 범일동에 2000여 평 부지를 매입해 생산시설을 갖췄다. 1949년 동명목재상사로 사명을 변경한 후 합판 생산에 나섰다. 원목 공급이 힘든 시기라 제재 과정에서 생긴 나무토막과 자투리를 모아 합판으로 만들어 원가를 절감했다.
한국전쟁을 겪은 후 동명목재상사는 급성장했다. 파괴된 시설 복구에 모든 이목이 쏠렸고, 합판과 목재 주문을 받아 200명 전 직원이 밤낮없이 생산에 매달렸다. 하지만 생산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대량생산을 위해 1960년 남구 용당동 바닷가 근처 200만 ㎡ 부지를 매입해 공장과 생산설비를 이전했다. 지속해서 품질 좋은 제품을 생산한 덕에 동명목재상사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다.
정부의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과 겹치며 동명목재상사의 합판은 불티나게 팔렸다. 미국이 동명목재상사 합판을 수입하고 싶다고 밝히며 자연스럽게 수출까지 이어지게 된다. 여러 호재 덕에 1965년 동명목재상사는 재계 1위에 오르며 위상을 떨쳤다. 1970년대에 들어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중국까지 시장을 넓혔다. 7년 연속 수출 1위를 이어가 1978년엔 매출 1000억 원을 기록했다.
동명목재상사는 1974년 동명산업을 시작으로 동명해운, 동명개발, 동명중공업을 설립했다. 1979년 남진식품을 인수해 동명식품으로 사명을 바꿔 사업다각화에 나서며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신군부에 강제헌납 “내가 왜 악덕기업인이란 말인가”
1979년 6월 강석진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나고 아들 강정남 씨가 회사를 맡아 운영하게 된다. 강정남 회장이 회사를 맡은 후 목재사업의 부진이 이어졌다. 원목 가격 상승이 원인이었다. 여기에 사업다각화로 인한 자금경색까지 동명그룹을 옥죄었다.
1979년 동명그룹은 125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창업주 강석진 회장이 1980년 경영에 복귀했지만 몰락을 막을 순 없었다. 1980년 5월 7일 매달 6억 원에 달하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동명목재상사는 휴업을 결정하게 된다. 이후 부도를 맞으며 동명그룹은 해체됐다. 그룹의 대들보였던 동명목재상사는 도산됐으며 동명산업과 동명중공업은 여러 기업을 거쳐 각각 미국 PPG 사와 두산그룹에 넘어갔다.
하지만 동명그룹 몰락은 경영 실패보다 신군부 영향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당시 안기부는 강석진 회장과 장남 강정남 씨 등을 부정축재를 일삼는 반사회적 기업인으로 지목해 자산을 모조리 강탈했다.
당시 자금난에 허덕이던 동명그룹이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과 만나 200억 원을 지원받기로 했다고 한다. 자금 지원을 통해 그룹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지만 당일 안기부에서 임원들을 납치하며 물거품이 됐다. 당시 류필윤 동명목재상사 전무는 “안기부에서 강석진 회장과 임원들을 15일 동안 감금해 외부와 소통이 단절돼 은행 거래를 할 수 없었고, 자산을 몰수당하며 부도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동명그룹은 결국 동명문화학원만 남기고 해체됐다. 강석진 회장은 “내가 왜 악덕 기업인이란 말인가”라는 말을 남기고 1984년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7년 강정남 씨와 두 딸은 국가를 상대로 “강제헌납 당한 토지를 되돌려달라”며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신군부의 강압에 의해 동명그룹이 강제헌납 됐다”고 밝혔다. 결국 동명그룹의 몰락은 신군부의 강압에 의한 헌납이었음이 밝혀졌고, 강석진 회장의 명예는 회복됐다. 당시 강제로 헌납한 재산은 토지 317만 ㎡(95만 8925평)와 주식 700만 주 등이었다.
동명그룹의 해체로 당시 부산 경제가 크게 흔들렸다고 전해진다. 3700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150여 곳의 대리점이 도산했으며, 동명에 부품을 공급하던 200여 개의 기업들도 연달아 폐업 위기를 겪었다.
정동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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