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종교와 상관없이 사찰은 아이와 함께 가볼 만한 곳이다. 무엇보다 우리 역사는 불교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고,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찰 방문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석가탄신일을 즈음해서는 특히 그렇다. 우리 사회의 안녕과 개인의 소원을 빌고,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은 덤이다. 코로나19로 장거리 이동이 불안해졌으니, 가까운 곳이라면 더욱 좋겠다. 서울 강남 빌딩숲 속에 자리한 천년 고찰 봉은사는 어떨까.
#도심 속 소나무 숲길 산책
조선 시대의 기본 정책이 숭유억불이었다지만, 왕실은 불당을 짓고 절을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다. 신라 시대에 처음 창건된 봉은사 또한 왕실의 지원으로 성장했다. 15세기 연산군 때에 정현왕후가 절을 새로 지으면서 봉은사라는 이름을 붙였고, 16세기 명종 때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는 자신이 총애하던 승려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앉히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문정왕후의 뜻에 따라 중종의 왕릉이 봉은사 자리로 옮겨오고, 봉은사는 지금의 자리로 이사하면서 큰 규모로 확장되었다. 삼존불을 봉안한 대웅보전과 관음도량의 중심 관음전, 진여문, 천왕문, 해탈문, 나한전, 심검당, 열반당 등 대규모 건물들이 속속 들어섰다. 문정왕후 사후에는 보우 선사가 제주도로 유배되는 등 봉은사도 내리막길을 걸었지만, 근현대를 거치면서 서울 강남의 대표사찰로 예전의 영화를 되찾았다.
도심 속 빌딩숲 사이에 자리 잡은 봉은사는 여전히 규모가 큰 사찰이다. 정문인 일주문을 지나면 대웅전을 비롯해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나오고, 그 뒤로는 23m 높이의 거대한 미륵대불이 사찰 전체를 굽어보고 있다.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규모가 큰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절 뒤편의 소나무 숲길은 산책 코스로 아주 훌륭하다. 평일 점심 시간이면 이 길을 산책하는 근처 직장인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복잡한 도심 속에서 이리도 한가로운 숲길이라니, 도심 사찰 봉은사는 도량뿐 아니라 휴식 공간의 역할도 겸하는 듯하다.
#추사의 마지막 작품 ‘판전’
방문자의 눈길을 끄는 건 웅장한 미륵대불이지만, 봉은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뜨기 3일 전에 썼다는 판전의 현판이다. 얼핏 보면 비뚤배뚤, 도무지 조선 대표 명필의 글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원래 대가의 작품은 말년으로 가면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도 한단다.
추사의 글씨 말고도 봉은사에는 문화재들이 가득하다. 대웅전에 자리 잡은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보물 제1819호)과 고려시대에 제작된 봉은사 청동 은입사 향완(보물 제321호) 등이 대표적이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봉은사에서 만들어진 삼불좌상은 조선 후기 최고 조각승으로 손꼽히는 승일 스님의 작품이다. 지금도 봉은사 대웅전에 나란히 앉아 번뇌의 바다에서 신음하는 중생들을 굽어보고 있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 승과 시험을 치르던 선불당과 장흥사 동종, 영산전 사자도와 신중도 등 수십 점의 문화유산이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2021년의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봉은사에선 봉축 법요식과 점등식, 문화공연, 영화상영 등 풍성한 행사가 펼쳐진다. 당연히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행사가 진행될 테지만, 그래도 인파가 부담스럽다면 부처님오신날을 지나서 봉은사를 찾는 것도 좋다. 아이와 함께 여유롭게 사찰을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
절 입구에 있는 사천왕상과 부도, 대웅전과 탑을 보면서 아이에게 불교 문화 전반과 그것이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건 어떨까.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왕권을 강화했고, 백성의 종교가 되었으며, 문화 예술의 발달을 이끌었다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종교들이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걸 강조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서울시청 앞 광장에 거대한 불탑이 서 있지만, 12월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로 바뀔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종교가 차별없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이도록 하자.
<여행메모>
봉은사
△위치: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문의: 02-3218-4800
△이용시간: 일출~일몰, 연중무휴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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