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드라마 ‘보쌈-운명을 훔치다’의 시청률이 남다르다. 지난 5월 1일 첫 방영한 MBN 종편 10주년 특별 기획으로 제작된 ‘보쌈-운명을 훔치다’(이하 ‘보쌈’)는 3.1%의 시청률로 시작해 6회차에 6.5를 기록했다. MBN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우아한 가’의 기록을 깨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마니아층이 있어 기본 시청률은 먹고 들어가는 사극이라지만, ‘보쌈’의 인기는 확실히 눈에 띈다. 왜 ‘보쌈’이 인기인 걸까?
우선 보쌈이라는 소재 자체가 남다르다. 삶은 돼지고기를 썰어 김치 등과 싸 먹는 음식 보쌈이 아니라 남 몰래 과부를 보에 싸서 데려와 부인으로 삼는 보쌈이다. 가난하여 혼기를 놓친 노총각이나 홀아비 등이 결혼을 하고자 보쌈을 자행했다는데, 당사자 간 혹은 당사자의 부모 간에 은밀히 합의를 하고 보쌈을 행하는 경우도 많았단다. 과부의 재혼을 금하고 정절을 강요하던 사회에서 일종의 관습으로 용납하던 보쌈을 이용, ‘어쩔 수 없었다’고 남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총각도 보쌈을 당하곤 했다. 과부 팔자라고 점괘를 받은 딸이 있는 경우, 그 부모들은 몰래 외간 총각을 잡아와 딸과 모의 결혼을 시켜 액운을 면하게 했다. 단, 과부 보쌈과 달리 총각 보쌈은 쥐도 새도 모르게 총각을 죽여 없앴다고. 드라마 ‘보쌈’은 그간 대중문화에서 정면으로 다뤄본 적 없는 보쌈을 소재로 해 흥미를 돋운다.
둘째, 보쌈을 당하는 인물이 그냥 과부가 아닌 왕의 딸이라는 발칙한 상상력. ‘우리 아빠의 공주’가 아니라 진짜 공주다. 아니, 정확히는 왕과 후궁의 딸이므로 옹주(어쨌든 영어로는 princess). ‘보쌈’에서 주인공 바우(정일우)는 생계형으로 이따금 합의된 보쌈을 해주는데, 하필 집을 착각해 보쌈해온 인물이 왕의 딸이자 좌의정 이이첨(이재용)의 과부 며느리인 화인옹주(권유리)다. 며느리가 보쌈당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시아버지가 옹주가 자결했다고 거짓 장례를 치르면서 옹주는 살아서는 안 될 사람이 되고 만다.
셋째, 아직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시적 ‘한 집 살이’를 시작한 바우와 화인옹주가 원수지간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애틋한 사랑을 나누며 시청자의 애간장을 녹일 전망이다. 옹주의 아버지인 임금은 광해군(김태우). 광해군은 자신에게 위협되는 이복동생을 낳은 계모 인목왕후(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로 잘 알려져 있으나 정식 명칭은 인목왕후 혹은 소성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그 친정을 몰살시킨 바 있다. 6화에서 바우가 인목왕후의 친정 아버지 김제남의 손자라는 것이 드러나며 옹주와는 원수 집안의 사이임이 드러났다. 옹주의 시아버지 이이첨이 김제남 집안을 몰락시키는데 앞장섰으니, 이이첨의 아들이자 어릴 적부터 옹주를 연모한 옹주의 시동생 이대엽(신현수)도 바우의 철천지원수가 된다.
넷째, ‘보쌈’은 바우와 화인옹주, 그리고 이대엽을 주인공으로 하는 로맨스 퓨전 사극이지만 임진왜란 직후이자 조선시대에 연산군과 더불어 유이하게 폐위당한 군주 광해군의 시대를 다룬다. 자연 사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치 다툼이 빚어낼 흡인력이 상당하다. 실수로 보쌈당한 옹주를 죽었다고 거짓말하는 이이첨도, 옹주가 살아 있음을 알아채지만 옹주를 죽여서라도 이이첨과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고자 하는 비정한 아버지 광해군도, 광해군의 측근이면서 이이첨과 협조 관계에 있는 상궁 김개시(송선미)도 모두 살벌한 정쟁(政爭) 중이다. 이들의 관계에 얽힌 주인공들도 한 순간의 판단으로 내가 죽거나 상대방이 죽을 수 있으니 그 긴장감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돌아온 일지매’ ‘해를 품은 달’ ‘야경꾼 일지’ ‘해치’ 등 여러 사극을 거치며 ‘사극 남신’으로 불리는 정일우와 첫 사극임에도 제법 안정적인 연기를 보이는 소녀시대 출신 권유리의 궁합이 괜찮고, 실제 역사와는 괴리가 있는 퓨전 사극이지만 정통 사극의 분위기를 크게 해치지 않는 ‘선’을 지키며, 묵직한 서사와 코믹한 설정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보쌈’의 인기 고공행진을 뒷받침한다. 또한 ‘파스타’ ‘골든타임’ ‘미스코리아’ ‘부암동 복수자들’ 등을 연출한 권석장 PD의 연출력이 드라마를 안정적으로 이끄는 중이다.
20부작 예정인 ‘보쌈’은 앞으로 내달릴 일만 남았다. 죽기보다 살기를 택한 옹주의 운명은 어떻게 변할 것인지, 출생의 비밀이 있어 보이는 이대엽이 정치 싸움에서 어떻게 이용될 것인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폐위와 인목왕후 집안의 복권은 예정돼 있으니 그때 옹주와 사랑에 빠져 있을 바우의 선택은 어떤 것인지 등등. 보통 사극은 역사가 스포일러지만, ‘보쌈’은 로맨스 퓨전 사극이니까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이미 ‘보쌈’에 시간을 보쌈당한 애청자들은 쭈욱 ‘보쌈’과 함께할 수밖에. 본방과 재방송 외에 시청하려면 OTT 플랫폼 웨이브에서 시청할 수 있다.
드라마와 별개로, 역사 속에서 왕의 딸들은 행복한 경우가 많지 않았다. 왕의 아들만큼의 존재감은 없지만 왕족이기에 정치적으로 정략결혼을 해야 했고, 혼인 이후에는 시가와 남편의 앞날에 따라 운명 또한 달라졌다. 실제 광해군의 유일한 딸이었던 옹주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오랫동안 숨죽여 살다 25세에 겨우 혼인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 태어난 경순공주는 이복오라비인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 때 동복 동생들과 남편의 죽음을 맞는 비극을 겪고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홍수현이 연기해 대중에게 유명한 문종의 딸 경혜공주는 삼촌인 세조가 남편과 친동생을 죽이는 것을 지켜보았으나 자식의 앞날을 위해 원수인 세조와 화해해야만 했다. 드라마 ‘화정’의 주인공이었던 정명공주는 이복오라비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서궁에 유폐하면서 오랜 시간 죽은 듯 살아야 했고, 인조의 딸 효명옹주는 어머니 귀인 조씨와 시아버지 김자점의 악행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의 죄 또한 드러나 폐서인되었다.
이외에도 조선시대 왕녀 중 유일하게 남편을 따라 죽어 열녀가 된 영조의 딸 화순옹주나 영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나 조카인 정조와 척을 지며 폐서인되고 유배를 떠난 화완옹주,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정신병까지 앓아야 했던 덕혜옹주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행복한 공주나 옹주를 찾기가 굉장히 힘들다.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 태어나 부모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뒤 안맹달을 남편으로 맞아 금슬 좋게 4남 2녀를 낳았다는 정의공주 정도가 잡음도 없고 평온한 삶을 살았던 정도? 광해군의 딸도, 설령 인조반정이 없었더라도 그의 삶이 행복했을지는 의문이다. 왕의 딸이라도 남편이 죽으면 재혼할 수 없는 건 다른 여염집 여자들과 마찬가지니까. 어쩌면 보쌈으로 새로운 삶에 내던져진 드라마 속 화인옹주가 더 행복에 근접해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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