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타이레놀 한두 알이 아니라 대학병원 몇 달치 약을 가져온다고 생각해봐요. 시장에 있는 약국이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다 받아주는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힘이 달려서 그렇게 못해요.”
서울 마포구 주택가에서 20년 가까이 약국을 운영 중인 70대 이 아무개 씨는 10년 가까이 폐의약품 수거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폐의약품 수거 사업 초기에는 가정에서 복용하지 않는 약을 약국에 가져오는 사람들이 드물었지만 최근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약을 들고 찾아온다. 이씨는 “일일이 포장을 까서 가져오는 게 맞는 건데 그렇게 하는 사람은 몇 없다. 한 짐 들고 오는 사람들은 돌려보낸다”고 말했다.
인근의 또 다른 약사는 “약국의 의무는 아니지만 폐의약품이 생활쓰레기나 음식물쓰레기와 함께 버려지면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폐의약품은 냄새가 많이 난다”며 “보건소가 주기적으로 수거해가는 건 아니고 일정량이 채워졌을 때 보건소에 연락하면 직원이 가지러 온다”고 전했다.
#땅에 묻으면 ‘독’, 회수해 소각해야
약국이나 병원, 제약회사 등에서 발생하는 폐의약품은 사업장폐기물이나 의료폐기물로 분류돼 일괄 처리된다. 반면 가정에서 발생한 폐의약품은 약국이나 보건소, 주민센터 등을 거쳐 소각된다. 의약품이 생활 쓰레기와 섞여 땅에 매립되거나 하수구, 변기통을 통해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항생제 등 각종 약품의 화학성분이 물과 토양으로 흘러들어갈 경우 환경오염과 더불어 유전자 변이 등의 생태계 문제로까지 이어질 위험이 있다.
‘가정 내 폐의약품 회수·처리 사업’은 2008년 서울에서 시범 실시된 후 2010년 환경부와 보건복지부 주관 하에 전국으로 확대됐다. 각 지자체는 주민들에게 약국과 보건소에 폐의약품을 가져와줄 것을 권고하며 수거함을 비치해 놓기도 했다.
마포구의 경우 보건소 의약과와 구청 청소행정과, 대학약사회가 협력해 폐의약품을 수거 및 처리한다. 주민들이 관내 약국에 폐기할 약을 가져오면 보건소 인력이 이를 운반하고, 청소행정과가 마포자원회수시설을 통해 소각하는 식이다. 마포구 청소행정과는 “대부분의 약국들이 거점 약국으로서 협조를 해주고 있다”며 “마포자원회수시설에서 100% 소각 처리된다”고 밝혔다.
마포구의 사정은 나은 편이다. 지자체별로 폐의약품 회수 처리 사업의 절차와 체계는 제각각이다. 폐의약품은 2019년부터 폐기물 관리법상 생활계 유해폐기물로 분류돼 시군구청장의 소관 업무다.
금천구의 한 약사는 폐의약품 수거절차에서 구청의 역할이 크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약을 배달해주는 도매업자가 폐의약품을 수거해준다. 그분들이 보건소로 운반하는 일을 대행하는 걸로 안다”며 “보건소 자체 인력이 오는 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수거함은 원래 비치해 놨다가 너무 작고 관리하기가 어려워 치웠다”고 했다.
현재 금천구 관내에서는 의약품 도매업자들이 구청 환경과에 폐의약품 수거를 신고한 후 자체 처리하고 있다. 금천구청 측은 “작년까지는 보건소가 주관했지만 현재 구청 청소행정과 관할 업무로 이전되면서 구체적인 수거체계를 검토하고 있다. 환경과와 보건소에 수거 데이터가 없다고 해 파악 중”이라며 “앞으로 주민센터에 수거함을 설치, 일정 주기마다 수거해 소각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다른 지역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대전 서구의 경우 약국의 폐의약품은 의약품 도매상이 수거하고, 주민센터의 폐의약품은 구청 환경과가 운반한다. 이렇게 모인 약들은 신탄진에 위치한 폐기물 업체에서 처리된다. 광주(광역시) 북구에서는 협력 업체가 수거한 폐의약품들이 민간 업체를 통해 소각된다.
#지자체마다 처리 원칙 달라…열 곳 중 세 곳만 조례 있다
전문가들은 폐의약품 대부분이 소각되고 있지만 일부는 여전히 매립된다고 말한다. 폐기물을 위탁 처리하는 지자체에선 폐의약품이 소각되는지 매립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약품유통협회 관계자는 “폐의약품 수거와 폐기를 총괄하는 컨트롤 타워가 없는 상황”이라며 “명확한 기준이 없어서 지자체에 따라서 생활쓰레기에 함께 버려도 된다고 안내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국민권익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2019년 11월 기준 전국 228개 기초지방자치단체 가운데 폐의약품 수거와 관련해 조례가 있는 지자체는 32.7%인 74곳에 불과했다.
약사들은 폐의약품 처리 부담을 약국이 짊어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환경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지자체와 정부가 나서야 할 사안임에도 사업 초기 팔을 걷어붙인 약사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현재 폐의약품 수거체계는 2009년 환경부, 복지부, 대한약사회 등 7개 기관이 마련한 민·관 협약을 골격으로 한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폐의약품은 악취가 나고 약과 포장을 분류하는 작업엔 손도 많이 간다. 수가가 반영되는 사업도 아닌데 지자체는 크게 품 들이지 않고 약국만 실무 부담을 떠안고 있다”고 토로했다.
폐의약품 처리가 환경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환경부와 복지부, 지자체가 수거 체계를 재정비한 후 보관부터 운송, 소각 절차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경기연구원 이정임 선임연구위원은 “현재의 정책은 명확하지 않고 붕 떠 있는 측면이 있다”며 “폐의약품은 쓰레기라는 점에서 환경부의 소관이고 약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복지부와 긴밀한 사안이다. 지자체와 함께 명확한 회수 및 처리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환경부는 과거 민간 협약에 따라 자율에만 의존했던 체계를 보완하겠다는 입장이다. 환경부는 “생활계 유해폐기물 관리 지침을 개정하기 위해 지자체와 협의 중”이라며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약국을 수거 거점으로 삼는 방향은 유지하되, 수거 절차를 현실에 맞게 시스템을 정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은경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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