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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박정희와 김종필의 5·16이 탄생한 곳, 박정희 가옥

5·16 군사정변 모의하던 현장, 1920년대 '문화주택'으로 근대문화유산 지정

2021.05.12(Wed) 10:33:16

[비즈한국] 이제는 ‘군사정변’이 공식 명칭이 되었지만, 수십 년간 5·16은 ‘혁명’이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412호로 등록된 ‘서울 신당동 박정희 가옥’은 박정희와 김종필, 박종규 등 5·16 군사정변의 주역들이 쿠데타를 모의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일제 강점기에 ‘문화주택’이란 이름으로 지어진 박정희 가옥은 쿠데타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을 마치고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412호로 등록된 ‘서울 신당동 박정희 가옥’은 박정희와 김종필, 박종규 등 5·16 군사정변의 주역들이 쿠데타를 모의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손님을 맞던 응접실. 사진=구완회 제공

 

#대한민국 현대사를 바꾼 현장

 

평범한 주택에 ‘박정희’라는 문패가 눈길을 끈다. 그 옆으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자그마한 간판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아담한 마당 한켠에는 익숙한 인물들의 실물 사진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아니, 아이들에게는 낯선 얼굴일 것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영욕을 함께한 인물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순간이다. 

 

아담한 마당에서 집안으로 들어서니 소파가 놓인 응접실이 손님들을 맞는다. 응접실을 중심으로 안방과 자녀방, 부엌과 화장실, 서재 등이 빙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부엌 뒤로는 작은 식모방과 장독대까지 놓아서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담한 마당 한켠에는 박정희, 육영수 부부의 실물 사진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사진=구완회 제공

 

이곳은 1920년대에 일제가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지은 ‘문화주택’이다. 넒은 마당을 중심으로 마루와 안방, 건넌방과 사랑, 부엌 등이 여유 있게 배치된 한옥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 마루 대신 응접실, 입식부엌과 실내 화장실까지 갖췄으니 문화주택이라 부를 만했겠다. 당시 신당동과 장충동 일대에는 이런 문화주택들이 단지를 이룰 정도로 많았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이곳이 유일하단다. 덕분에 박정희 가옥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 되었다.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여기서 5·16 군사정변이 모의되었기 때문이다. 

 

#3수(?) 끝에 성공한 쿠데타

 

1961년 5월 15일 밤 10시. 육군 소장 박정희는 신당동 집을 나서며 아내 육영수에게 “내일 아침 뉴스를 잘 들어보오”라는 말을 남겼다. 이때 육영수는 다음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을까? 며칠 전부터 김종필과 박종규, 차지철 등 쿠데타의 주역들이 드나들며 5·16 군사정변의 실행 계획을 다듬고 있었으니, 어쩌면 그녀도 눈치챘을지 모른다. 15일에는 쿠데타 군들이 신당동 박정희 가옥에서 출동 대기 중이었고, 그 전날에 서재에서 박정희와 김종필은 혁명 공약을 마지막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5월 16일 새벽. 서울 입성에 성공한 쿠데타 세력은 방송국을 장악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어쩌면 뜬눈으로 밤을 새웠을 육영수도 이 방송을 들었을 것이다. 

 

지금 박정희 가옥에 전시된 물건들 중에 ‘진품’은 없다고 한다. 대신 사진과 지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최대한 당시의 모습과 가깝게 재현해 놓았다. 사진=구완회 제공

 

박정희가 쿠데타를 기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에게서 민심이 떠난데다 미국과도 마찰을 빚자 쿠데타를 일으킬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두 번째 시도는 이승만 정권 말기에 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세 번째 시도 끝에 박정희는 결국 쿠데타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퇴임 대통령 관저가 될 뻔한 사연

 

박정희와 군인들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서재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옷장 옆에는 별을 두 개 단 군복이 걸려있고, 작은 책상 위의 낡은 라디오에서는 당시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지금 박정희 가옥에 전시된 물건들 중에 ‘진품’은 없다고 한다. 대신 사진과 지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최대한 당시의 모습과 가깝게 재현해 놓았다. 박근혜와 근령, 지만 남매가 썼던 방에는 당시 이들이 배웠던 초등학교 교과서를 전시해 두었다. 아내의 공간이었던 안방에는 앉은뱅이 책상과 경대, 수동 재봉틀 등이 눈에 띈다. 실재로 육영수는 근처의 중앙시장에서 천을 끊어다가 손수 아이들의 옷을 지었다고 한다. ​

 

이곳에서 나와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공관을 거쳐 청와대로 들어간 후에도 육영수는 신당동 집에 각별한 애정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아마 남편이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살 생각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 신당동 박정희 가옥은 근대문화유산이 되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신당동 박정희 가옥은 근대문화유산이 되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구완회 제공

 

<여행메모> 


서울 신당동 박정희 가옥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다산로36가길 25

△문의: 02-2231-5143

△이용시간: 10:00~17:40, 월요일 휴관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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