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비즈한국 BIZ.HANKOOK

전체메뉴
HOME > Target@Biz > 비즈

[기업의 흥망] 섬유업계 첫 해외진출, 갑을그룹엔 '독' 됐다

직물/건설로 계열 분리 후 탈섬유·해외 섬유업 강화하다 실패…건설 쪽 KBI그룹 남아 명맥 유지

2021.05.04(Tue) 17:54:53

[비즈한국] 형제의 이름 끝자를 따서 세운 ‘갑을그룹’은 1951년 작은 포목상을 바탕으로 시작해 섬유종합그룹을 일궜다. 면방업계의 후발주자였던 갑을그룹은 1970년 중반 설비 증설을 통해 성장궤도에 올라섰다. 이후 박재갑 회장의 장남 박창호 회장과 동생 박재을 회장의 6년간 공동경영 끝에 두 갈래로 나눠진다. 그러나 분가 후 공격적으로 사업 다각화에 나선 박창호 회장은 외환위기를 넘지 못하고 무너졌고, 박재을 회장의 KBI그룹이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2001년 대구 비산염색공단 내에 있던 (주)갑을 대구공장. 사진=연합뉴스

 

#포목상으로 시작한 ‘갑을그룹’

 

1923년생인 박재갑 갑을그룹 창업주는 13세에 만주에서 여러 일을 통해 번 돈으로 정미소를 운영했다. 해방 후 재산을 만주에 남겨둔 채 한국으로 돌아와 1951년 대구에서 포목상으로 활동했다. 7년간 포목상으로 번 돈으로 1958년 동생 박재을 씨와 신한견직합명회사를 설립한 게 갑을그룹의 시작이다. 24개의 직기가 전부였지만 1960년대 월남파병 특수와 민간수요 급증 등에 힘입어 사업은 급속도로 확장됐다. 

 

1965년 무역회사인 동국실업을 인수해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박재갑 창업주는 상품 마케팅 차원에서 청와대에 제조한 직물을 선물하기도 했는데, 대구를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박재갑 씨를 찾아오면서 유명세를 탔다. 1970년 석유파동으로 성장세에 제동이 걸렸지만 면방업계 섬유 수출 호황 등을 맞으며 극복했다. 1974년 갑을견직과 (주)갑을, 갑을방적, 갑을건설 등을 세우면서 그룹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갑을방적은 면방업계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진 못했다. 1위 충남방직에 비해 설비 등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에 박재갑은 면정방기 5만 추, 직기 1500만 대 등 설비를 2배로 늘렸고, 아프리카와 중남미 지역을 개척해 15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이는 성과를 거뒀다. 1980년에는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해 금탄산업훈장 수상했다. 

 

1982년 박재갑 창업주가 사망할 당시 갑을그룹의 계열사는 11개였다. 이후 박재갑 창업주의 동생 박재을 회장과 장남 박창호 사장이 갑을그룹을 함께 이끌었다. 하지만 경영관의 차이로 1988년 4월 주주총회에서 분리를 결정한다. 박창호 사장은 (주)갑을 등 직물 관련 6개 계열사를, 박재을 회장은 건설, 부동산 임대 등과 관련한 9개 사를 운영하게 됐다. 

 

#분리 후 두 그룹의 행보

 

직물 관련 6개 계열사를 운영하던 박창호 회장은 면방업계 쇠퇴에 직면했다. 임금도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힘든 시기를 겪었다. 박창호 회장은 해외시장 진출과 국내 탈섬유를 토대로 반전을 꾀하려 했다. 1989년 4월 (주)테레비디오컴퓨터 인수를 시작으로 영남신문, 갑을마그네틱, 서린호텔, 갑을엔지니어링, 갑을통신 등을 인수·설립하며 탈섬유화를 추진했다. 

 

면방업계 최초로 해외투자에도 나섰다. 스리랑카에 ‘갑을랑카’를 설립해 국내 면방업계 최초 해외투자를 알렸다. 당시 스리랑카는 불안한 정세와 노조파업이 잦아 그룹 내부와 업계에서도 ‘무모한 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립 6개월 만에 공장 정상 가동과 더불어 첫해부터 흑자를 냈다. 이후 중국 등지와 우즈베키스탄 등 해외에 대규모 공장을 건립하며 세계화를 꾸준히 진행했다. 

 

갑을랑카 흑자 추이. 사진=연합뉴스


박창호 회장의 갑을그룹은 섬유, 금속, 기계, 건설, 레저, 전자, 통신, 금융 등 여러 분야로 사업 다각화를 이뤘고, 계열사는 15개가 됐다. 10개의 해외법인까지 있어 외형적으로는 크게 성장했다. 그룹 매출은 1조 원을 웃돌았다. 

 

하지만 대부분 차입에 의존한 성장이었다. 해외법인 설립과 공장 증설을 위해 3350억 원을 차입한 데다 사업 다각화를 위해 투자한 5000억 원도 묶여 있었다. 인수·설립한 계열사들은 수익을 내지 못했​으며, 주요 수익원인 (주)갑을과 갑을방적 역시 섬유산업 쇠퇴로 이익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1998년 7월 갑을그룹은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박창호 회장은 200억 원을 회사에 헌납하며 재무구조 개선과 유동성 확보에 힘썼다.

 

갑을그룹은 섬유와 전자를 주력으로 경쟁력 없는 사업을 분리 및 통폐합하기로 결정하고 여러 계열사를 통폐합했다. 하지만 2002년 2379억 원의 순손실을 기록하며 전액 자본잠식에 빠졌다. 이후 2003년 3월 회사정리절차명령을 받게 됐고, 박창호 회장의 방배동 자택은 2002년 경매로 넘어갔다.

 

갑을상사그룹은 2019년 KBI그룹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사진=KBI그룹 제공


한편 박재을 회장은 1989년 분리 이후 갑을합섬그룹으로 사명을 변경한 뒤 외환위기 극복 후 갑을그룹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1991년 박재을 회장이 사망하면서 그룹은 장남 박유상 씨가 이끌었고, 2015년부터는 박유상 씨가 고문으로 자리를 옮기고 동생 박효상 회장이 그룹 전체를 경영하고 있다. 이들의 동생 박한상 사장은 그룹의 건설, 의료부문 등을 맡아 형제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2019년 갑을상사그룹에서 KBI그룹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KBI그룹은 자동차부품, 산업재, 건설·부동산, 섬유, 환경·에너지, 의료부문 등의 사업을 영위하며 국내 24개, 해외 9개의 계열사를 갖고 있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핫클릭]

· [기업의 흥망] 미도파백화점 포기했다면…대농그룹의 불운
· [기업의 흥망] 재계 7위였던 금호그룹과 박삼구 회장은 어떻게 몰락했나
· [기업의 흥망] 삼성도 탐냈던 기아그룹의 몰락
· [기업의 흥망] 수직계열화 체제 갖춰 성장하던 고합그룹의 외도
· [기업의 흥망] 부실기업 살려 성장한 신호그룹, 결국 외환위기에…


<저작권자 ⓒ 비즈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