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베를린은 1870년경 유럽에서 가장 크고 발전하는 도시 중 하나였다. 특히 1900년대에는 유명 은행들의 본사가 대부분 베를린에 자리해, 유럽의 금융은 베를린이 주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분단되면서 동독에 둘러싸인 서베를린 지역은 하나의 고립된 섬이 되었고, 주요 기업들은 모두 서독으로 이전했다. 1989년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베를린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도시로 전락했다.
베를린이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된 뒤 산업 재건을 위한 노력이 다시 시작됐다. 기반이 없어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서비스, 기술, 창조 분야의 산업이 베를린에 자리 잡았고, 지멘스(Siemens), 도이치은행(Deutsche Bank), 루프트한자(Lufthansa), 알리안츠(Allianz)와 같은 다양한 분야의 대기업이 제2의 본사를 설립하면서 베를린은 서서히 경제적으로 활기를 띠었다. 물론 금융 중심지 프랑크푸르트, 명문 공과대학 등을 기반으로 연구·개발 중심의 기술산업이 이끄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본, 뒤셀도르프, 쾰른이 속한 주), 하나의 국가로 독립해도 손색없을 경제력을 가진 바이에른주와는 아직 경쟁이 되지 않았지만, 통일 이후 정치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베를린은 점점 중요한 도시가 되어간다.
한편 다른 도시에 비해 물가가 싸다는 이유로 예술가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함부르크에서는 록음악, 뒤셀도르프에서는 일렉트로팝이 도시의 소리를 주름잡았다면, 베를린에서는 테크노 음악이 으뜸이었다. 분단 시절에도 베를린에는 음악이 흘러넘쳤다. 1960년대에 시작된 베를린 테크노 음악의 유행은 서독 지역에서 군 복무를 피하려는 청년들이 주도했다. 컴컴한 클럽에 모여 실험적 음악을 하며 즉흥 연주를 즐기던 뮤지션들은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을 중심으로 이를 저항적 문화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1990년대 베를린만의 독특한 테크노 음악은 몇몇 클럽을 중심으로 베를린의 서브컬처를 주도했다. 금요일 밤에 입장해서 월요일 아침까지 밤을 새워 즐기는 젊은이들이 베를린의 클럽으로 모여들었고, 곧 전 세계 수백만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게 된다. ‘베를린=놀기 좋은 곳’으로 인식이 되면서 젊은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현재 베를린은 인구의 55%가 45세 이하이고, 평균 연령 42.7세인 젊은 도시다. 동시에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국제적인 도시다. 베를린에는 현재 190개국 출신의 사람들이 살고, 도시 전체 인구의 21%가 외국 출신이다.
베를린시는 다른 도시들이 중점을 둔 자동차, 금융, 바이오·헬스 분야에서 주도권을 가져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고, 젊고 국제적인 도시 분위기를 부각해 스타트업을 유치하고 적극 지원하는 것으로 정책 방향을 설정했다. 마침 세계적으로 스타트업 붐이 일어나던 때와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다. 구글과 협력해 2014년에 설립된 팩토리 베를린은 베를린시의 스타트업 유치에 많은 역할을 했다. 베를린시 산하 경제진흥기관 베를린 파트너(Berlin Partner für Wirtshcaft und Technologie GmbH)도 ‘스타트업’에 중점을 둔 비즈니스 지원 프로그램 등을 개설하고 스타트업을 유치하는 데 앞장섰다. 돈은 없어도 아이디어가 있는 많은 창업자가 베를린으로 모여들었고, 베를린은 독일에서 스타트업이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베를린에는 연 평균 4만 개의 사업자가 등록하는데 이 중 500개가 스타트업이다. 이제는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라는 타이틀보다도 ‘창업자, 예술가들의 도시, 국제적이고 젊은 도시’ 라는 타이틀이 어울리게 되었다. 베를린 GDP의 80%는 창의·문화 산업, 관광, 미디어·정보통신 기술, 운송 시스템 등의 산업이 차지한다. 2017년에는 사물인터넷(IoT)과 핀테크 허브로 선정돼 독일에서 가장 많은 IoT와 핀테크 스타트업이 있는 도시가 되었다. 독일 전체 핀테크 기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95개의 핀테크 스타트업이 베를린에 있다.
전통적인 금융도시의 타이틀은 여전히 프랑크푸르트가 거머쥐고 있지만, 금융의 새로운 아이디어는 대부분 베를린에서 시작된다.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까지 진출해 세계 금융시장을 놀라게 한 유니콘 N26도 베를린에서 시작했다. 러시아 금융계를 평정하고 유럽에 진출한 Vivid, 기업 계좌를 손쉽게 만들고 세무, 회계 등의 프로그램과 연동해 쉽게 관리할 수 있도록 만든 Penta, 쉬운 주식투자를 위한 앱 Trade Republic도 베를린 출신이다.
많은 독일 대기업들도 혁신을 찾기 위해 베를린을 주목한다. 자체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팅 기관을 베를린에 설립하는 것이 대기업 사이에 유행이 될 정도다. 제약회사 바이엘의 그랜츠포앱스(Grants4Apps)는 바이오·헬스 분야의 스타트업을 찾고 있으며, 통신회사 도이체 텔레콤은 허브라움(Hubraum)이라는 코워킹 스페이스를 운영하며 미래의 성장 주역이 될 회사들과 교류하고 있다. 독일 최대 미디어 기업 악셀 슈프링어(Axel Springer)는 실리콘밸리와 협력해 악셀슈프링어 플러그 앤 플래이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독일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것은 녹록지 않다. 특히 세계 어느 곳보다 ‘빠른 서비스’를 경험한 한국사람에게는 ‘어떻게 이런 나라가 선진국일까’ 싶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독일인들도 스스로 디지털화에 뒤처졌고 혁신이 부족하다고 평가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창업자들에게 독일은 그야말로 개선과 혁신의 손길이 곳곳에 필요한 가능성의 땅이다.
그 가운데서도 베를린은 특별하다. 무질서가 많고, 아마추어와 햇병아리들의 천국이다. 실패해도 먹고살 걱정이 별로 없는 낮은 물가가 이들의 도전을 든든하게 지탱해준다. 삶의 방향을 다양하게 시도해보는 도전자들의 낙원. 이런 면에서 베를린은 독일의 미래다.
필자 이은서는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향수병에 못 이겨 다시 베를린에 와 살고 있다. 다양한 스타트업과 함께 일하며, 독일 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 한국 시장을 공략하려는 독일 기업을 안내하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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