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바야흐로 윤여정의 시대다. 1947년생, 한국 나이로 75세의 이 배우는 바다 건너 미국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쥐기 전부터 이미 힙했다. 늙었음을 인정하면서도 힙할 수 있음을, 윤여정만큼 자연스럽고도 위트 넘치게 보여준 인물은 드물다.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 수상이라는 ‘국뽕’ 가득한 뉴스만 존재했다면 폭풍 같은 칭송 뒤에 조용해졌을 게다. 분명 지금의 열광에는 ‘국뽕’도 일정 부분 있지만, 수십 년간 윤여정이란 인간이 걸어오며 쌓아온 자신만의 철학과 분위기가 절대 비율을 차지한다.
온 세상이 윤여정 이야기로 휩싸였다고 전한 지인 강부자의 말에 “언니, 그거 식혜에 동동 뜬 밥풀 같은 인기야”라고 답한 윤여정의 위트와 냉정한 현실감각을 보라. 그의 인기는 쉬이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그러니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이 분위기에 편승해 윤여정의 작품 좀 소개해 보겠다.
지난 수십 년간 윤여정이 쌓아온 필모그래피는 길고도 길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 2010년대 들어 나영석 PD와 함께한 일련의 예능 프로그램까지 존재한다. 영화도 이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작인 독립영화 ‘미나리’처럼,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영화들이 숱하게 많다. 당신이 구독하고 있는 어느 OTT에서든 윤여정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왓챠는 벌써 발 빠르게 ‘지금 가장 빛나는, 윤여정’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영화 7편의 필모그래피를 묶었다. ‘산나물 처녀’ ‘고령화가족’ ‘돈의 맛’ ‘계춘할망’ ‘장수상회’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 ‘그것만이 내 세상’이다. 이 필모그래피 외에도 드라마로는 ‘네 멋대로 해라’ ‘그들이 사는 세상’ ‘더킹 투하츠’ ‘내 마음이 들리니?’가 있다. 넷플릭스는 ‘죽여주는 여자’ ‘하하하’ ‘다른 나라에서’ ‘가루지기’ ‘찬실이는 복도 많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바람난 가족’이 왓챠와 겹치지 않는 영화 필모그래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센스8’에서도 분량이 많진 않지만 배두나와 함께한 윤여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CJ 계열의 OTT 플랫폼 티빙에서는 젊은층에게 윤여정의 힙한 모습을 널리 알린 예능 프로그램들을 만날 수 있다. 나영석 PD와 함께한 ‘꽃보다 누나’를 시작으로 ‘윤식당’ ‘윤식당2’ ‘윤스테이’를 시청할 수 있고, tvN 작품인 ‘디어 마이 프렌즈’도 업로드되어 있다. 지상파 3사와 SK텔레콤이 합작한 웨이브에서는 ‘두 번은 없다’ ‘여우야 뭐하니’ ‘여왕의 교실’ ‘참 좋은 시절’ ‘즐거운 나의 집’ ‘굳세어라 금순아’ ‘넝쿨째 굴러온 당신’ 등 여느 OTT에는 없는 지상파 드라마들을 대거 만날 수 있는 게 특징.
왓챠,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는 물론 쿠팡플레이까지 두루두루 윤여정의 작품을 만날 수 있으니, 분명 당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것은 ‘산나물 처녀’다. 러닝타임 28분짜리 단편 영화인 ‘산나물 처녀’는 2020년 개봉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연출한 김초희 감독이 연출한 작품. 평소 단편 영화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이들에게 ‘산나물 처녀’는 신선한 경험이 되어줄 텐데, 윤여정 외에도 무려 정유미, 안재홍이 등장하는 초호화 캐스팅(!)에 놀랄 것이다. 영화는 미지의 행성에서 남자를 찾아 지구로 온 70세 노처녀 순심(윤여정)이 나물 캐는 처녀 달래(정유미)를 만나고, 사냥꾼에 쫓기던 사슴의 조언으로 꿈에 그리던 남자까지 만난다는 이야기.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B급 감성으로 버무린 ‘산나물 처녀’는 윤여정의 시크하면서도 귀여운 매력과 정유미와 안재홍의 무해한 사랑스러움이 돋보이는 영화다.
특히 사랑이 끝난 뒤에도 좌절하지 않고 “얘는 무슨 그런 구닥다리 같은 소리를 하니”, “원래 인생은 70부터야”라고 일갈하는 순심이의 매력은 윤여정의 매력과 일맥상통한다. 영화 특유의 B급 감성이랄까, 병맛 개그의 코드가 안 맞으면 다소 당황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28분이면 보는 단편이니까 부담은 없다. 이 영화를 보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까지 이어 보는 것을 추천. ‘산나물 처녀’는 왓챠와 웨이브에서 시청 가능하며, 티빙에서도 개별구매로 볼 수 있다.
드라마로는 왓챠와 웨이브에 있는 ‘네 멋대로 해라’와 웨이브와 쿠팡플레이에서 볼 수 있는 ‘넝쿨째 굴러온 당신’을 추천하고 싶다. ‘네 멋대로 해라’에서는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떠나 아들과 떨어져 살았던 철없는 엄마를,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수십 년간 한이 되었다 극적으로 아들을 찾았지만 아들 부부가 낯선 엄마를 연기했다. 두 작품에서 모두 엄마지만 전형적이지 않은 엄마라는 점이 눈에 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정유순(윤여정)은 아들 고복수(양동근)가 소매치기를 해서 가져오는 돈의 출처를 묻지 않고 받는 엄마다. 갑자기 돈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돈을 다시 빌려줄 수 있는지 묻는 아들에게 “줬다 뺐었다, 내 앞에서 돈 가지고 유세하니?”라며 앙칼지게 몰아붙이는 엄마이기도 하다.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오랜 시간 돌보지 못한 아들에게 되려 뻔뻔하게 나오면서 미안함을 지워버리려는 엄마. ‘네멋폐인’들은 아들이 어떻게 돈을 가져다주는지 알고 난 뒤 엄마 유순이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반면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아들 귀남(유준상)을 잃어버린 죄로 수십 년간 한이 남았던 엄청애(윤여정)는 아들을 찾고도 섣불리 엄마임을 유세부릴 수 없는 엄마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히로인은 분명 엄청애의 며느리인 차윤희(김남주)였고, 드라마의 주된 줄기는 윤희가 청애를 비롯한 시월드를 감당하며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발랄한 터치로 그려냈다. 하지만 윤여정은 그 와중에도 윤여정이었다. 특히 귀남을 잃어버리게 된 진실을 알고 난 뒤 오열하는 장면은 언제 봐도 소름이 오스스 돋으며 함께 눈물 흘리게 되는 명장면.
‘미나리’가 가져다준 ‘국뽕’은 대한민국 사람들을 기분 좋게 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미나리’에서의 윤여정 연기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유난히 놀랍지 않았다면, 그건 우리가 평소 윤여정의 놀라운 연기를 익히 많이 보아왔기 때문일 거다. 지금 소개한 작품들 외에도 대부분의 작품에서 항상 ‘윤여정이 윤여정 했다’였으니까. 그러니, 윤여정의 연기를 번역없이 100%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하며 감상들 하자. 기왕이면 미나리전 부쳐서 막걸리 곁들여 보면 좋고.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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