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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미도파백화점 포기했다면…대농그룹의 불운

경영권 방어에 1200억 쏟아…면직업으로 성장, 유통업 변신, 부실 겹치고 적대적 M&A로 결정타

2021.04.23(Fri) 18:20:52

[비즈한국] 미도파백화점은 1960년대 화신백화점, 신세계백화점과 함께 3대 명품 백화점으로 이름을 날렸다. 미도파백화점을 소유하던 대농그룹은 면직업을 바탕으로 재계 3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대농그룹은 삼성그룹, 현대그룹과 함께 대표적인 재계 1세대로 승승장구했는데, 면직업의 쇠퇴와 사업다각화 실패와 경쟁사의 성장, 신동방그룹의 적대적 M&A에 맞서 경영권을 방어하느라 1200억 원대의 자금을 쏟으며 몰락하게 됐다. 

 

#‘재계 마당발’ 박용학 창업주

 

1915년 출생인 박용학 대농그룹 창업주는 일제강점기 말에 사설우체국을 운영하다가 광복 후인 1946년 대한기계작업소를 시작으로 1949년 오양실업, 1953년 대양비료를 설립하는 등 여러 사업에 발을 들였다. 이후 1955년 농산물을 취급하는 대한농산을 설립한다. 특이하게도 대한농산 설립 당시 신동아그룹 최성모, 원풍산업 이상순, 천일곡산 최호, 천부광업 어윤일이 동업자로 함께했다. 각 기업의 창업주가 동업을 하는 이례적인 모습 덕에 이들은 ‘5인 그룹’으로 불렸다. 

 

대한농산은 물자가 부족하던 시기를 잘 타고 고속 성장했다. 그러던 중 정부가 비료 수입을 불허하고 구상무역(두 나라 사이에 협정을 맺어, 일정기간 수출을 균등하게 하여 무역차액을 0으로 만들고, 결제자금이 필요 없게 하는 무역​)으로의 수입만을 허가하자 박용학은 많은 비료를 수입할 수 있는 방안과 현미, 백미, 오징어 등의 수출을 구상하게 된다. 이를 위해 부산냉동주식회사 지분 50%를 인수한다. 1962년 방계회사인 삼양수산의 수산물 냉동 시설 확장과 정부의 허가를 받고 참치잡이를 시작했다.

 

1990년 일본 고베에서 열린 한일 민간합동 경제위원회에서 한국 측 단장으로 나서 연설하는 박용학 대농그룹 창업주. 사진=연합뉴스


박용학 창업주의 성공적인 판단으로 대한농산의 사세는 지속적으로 확장됐고, 1967년 고려원양과 대한조선주식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수출입에도 발을 들였다. 이런 성장에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1964년 대한농산은 정부 정책을 믿고 많은 양의 소맥을 수입했는데, 정부의 매입 지연으로 인해 자금이 묶이고 은행 관리를 받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다행히 삼양수산의 냉동수산물 수출이 크게 수익을 올리며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다.

 

이후 1968년 박용학에게 큰 기회가 다가온다. 대농그룹의 기초가 되는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을 인수한 것인데,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가 인수를 권했다고 한다. 또 무역협회에서 운영하던 미도파백화점이 매물로 나와 1년 후에 대한농산에서 인수하는 행운도 거머쥐었다. 당시 미도파백화점은 화신백화점, 신세계백화점과 3대 명품 백화점으로 불렸다. 이 시기에 마련된 방직 사업과 백화점 사업은 추후 대농그룹의 주 수입원이 됐다. 

 

1973년 태평방직, 대한농산, 한일조직 등을 통합해 대농이 출범했다. 미도파백화점, 대한선박 등은 별도 법인으로 유지된다. 같은 해 세방기업의 이의순과 합작, 세방해운을 설립해 해운업에도 진출했다. 또 5인 그룹의 최성모가 소유한 신동화화재 지분 38%를 인수해 보험업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2차 위기가 찾아오며 사세는 위축된다. 1975년 국제 원면파동과 1차 오일쇼크로 인해 주거래 은행인 신탁은행 등 5개 은행의 관리를 피할 수 없었다. 대농은 금성방직 등 4개 회사를 내놓고 뉴관악골프장, 해운대호텔 부지 등을 매각해 위기를 극복했다. 

 

#대농의 삼재와 몰락

 

1977년 박용학 창업주의 장남 박용일 부사장이 대농의 사장으로 진급하며 2세 경영에 돌입했다. 박용일 사장은 대농이 맞은 두 번의 위기가 편중된 사업 탓이라 생각했고 본격적으로 ​사업다각화에 돌입했다. 1978년 대성건설진흥을 인수했을 뿐만 아니라 1989년 박용일 사장이 대농의 회장에 오르며 유통, 금융, 정보통신 등 여러 사업에 손대기 시작했다. 

 

1989년 대농창업투자, 1992년 광고대행사 메트로콤, 가공직물염색업체 경보, 1993년 편의점 스파메트로 등을 인수·설립했다. 1994년에는 건설중장비 제조업체 KJ산업 인수, 1995년 디즈니그룹 계열사와 함께 가상현실 컴퓨터 게임 산업에 진출하는 등 여러 사업에 진출했다. 1996년 말 대농그룹의 계열사는 22개에 달했다.

 

계열사 인수·설립에는 대농과 미도파백화점이 지급보증을 섰다. 하지만 계열사들 모두 성장하지 못하면서 부실이 누적됐다. 급격한 임금 상승과 더불어 면직업체 경기가 극도로 침체되는 상황도 겹쳤다. 1996년 대농은 2932억 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1986년 명동 미도파백화점 전경. 현재 롯데 영플라자가 위치한 자리다. 사진=연합뉴스


과거 두 번의 위기를 극복하며 성장한 대농이지만 이번엔 극복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신동방그룹이 미도파백화점을 갖기 위해 지분을 매입한 것. 대농그룹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1200억 원을 쏟아부었다. 경영권은 지켰지만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상황. 1996년 말 대농그룹의 총자산은 1조 8000억 원이었는데, 부채 규모도 이와 비슷했다. 결국 제2금융권에서 자금을 회수하면서 부도유예 협약대상 업체로 지정되고 만다. 

 

1997년 5월 대농그룹은 계열사 10곳을 정리하고 청주방적공장 부지 매각 등을 추진하며 회생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물거품이 됐다.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이 강세를 보이며 미도파백화점이 위축되는 악재까지 겹쳤다. 결국 대부분의 계열사는 매각되고, 미도파백화점은 2002년 8월 롯데쇼핑에 9682억 원에 인수되면서 그룹이 해체됐다. 

 

당시 재계에서는 “대농그룹이 미도파를 포기했다면 그룹 전체가 몰락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한 것으로 전해진다. 2005년 박용학 창업주와 박영일 전 회장의 자택은 경매로 넘어가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그룹 재건 등의 별다른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박용학 전 대농그룹 창업주는 2014년 8월 99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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