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오토바이를 부른 지 30초쯤 지났을까. 이내 녹색 헬멧과 점퍼를 입은 그랩(Grab) 라이더가 내 앞에 도착해 묻는다.
“아 유 킴(Are You Kim)?”
고개를 끄덕이니 녹색 헬멧을 건넨다. 언제나처럼 그랩 헬멧은 내게 모욕감을 준다.
‘또 안 들어가는군.’
우격다짐으로 헬멧을 쓰고는 오토바이에 올랐다.
출발하자마자 하늘에서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가 내리자 이 도시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조금씩 시원해졌다. 청량한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비 맞으며 오토바이를 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걸?’
적당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호찌민 시내를 질주하던 그 시간은 내가 호찌민에 와서 두 번째로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첫 번째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영화 ‘비트’의 정우성처럼 두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린 채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행여나 오토바이에서 떨어질까 무서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오토바이를 타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유의 8할은 바람이다. 호찌민 특유의 아열대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식히는 순간에는 어떤 근심 걱정도 사라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바람에 대해 이와 비슷한 생각을 소개한 적이 있다. 하루키는 에세이 ‘바람을 생각하자’에서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소설 ‘최후의 문을 닫아라’의 마지막 구절을 소개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을 생각하자.’
하루키는 ‘뭔가 고통스럽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늘 그 구절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바람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슬픔을 잊는 방법은 직접 바람을 느끼는 것이다. 이 도시에서는 그것이 쉽다. 그저 그랩(grab) 앱을 열고 오토바이를 부르면 된다.
처음에는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겁났다. 여기저기 묘기하듯 도로 위를 누비는 호찌민의 오토바이 행렬을 본다면 내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이다.
아내의 오토바이 금지령도 있었다. 아내는 이곳에 오기 전 호찌민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친 파견 직원의 산업재해를 처리했다. 그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아내는 베트남에 온 지 3개월이 다 된 지금까지도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다.
나도 한 달 정도는 자동차 택시만 타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단거리를 이동할 때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를 타면 자동차 택시의 절반 가격으로 더 빨리 목적지에 갈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호찌민에서 처음 오토바이를 탔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아들 유치원까지 가는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심장이 쫄깃쫄깃해오는 순간을 수 차례 경험했다.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를 지날 때에는 양쪽에서 돌진해오는 오토바이와 충돌하는 게 아닐까 싶어 그저 드라이버의 허리를 꼭 부여잡고 그에게 운명을 맡기는 심정으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호찌민의 베테랑 드라이버는 사고 없이 그 지옥 같은 교차로를 잘도 빠져나왔지만, 이후 일주일 동안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심정으로 오토바이 안장에 오르곤 했었다.
무작정 드라이버의 허리를 꽉 잡고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던 내가 이제는 주변의 풍경은 물론, 다른 라이더들의 패션까지 즐길 정도로 여유를 갖게 됐다.
드라이버의 허리를 잡는 방법도 바꿨다. 예전에는 무턱대고 옆구리 살을 부여잡았는데 이제는 엄지를 라이더의 허리 기립근 부분에 갖다 댄다. 그러면 옆구리살을 잡아서 생기는 민망함도 사라질 뿐 아니라 급정거 때 자연스럽게 지압 효과가 날 테니 종일 운전으로 피곤한 아저씨도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 정말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토바이를 타는 것만큼 그것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입국 후 2주의 격리기간 동안 틈만 나면 창밖을 바라보았다. 12층에서 내려다본 거리에는 오토바이의 쓰나미 행렬이 펼쳐졌다. 매일 보는 광경인데도 볼 때마다 놀라웠다. 마치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 나오는 좀비 떼처럼 어딘가에서 오토바이 떼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개미굴처럼 어딘가에 오토바이 굴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격리기간을 마치고는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오토바이를 볼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5인 가족이 한꺼번에 스쿠터를 타고 질주하는 모습에 “우와! 저것 좀 봐”하고 소리치곤 했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엄청난 양의 수하물을 싣고 달리는 오토바이나 뒷자리에서 옆으로 다리를 꼰 자세로 우아하게 도시를 질주하는 아가씨를 봐도 이제 놀라지 않는다.
그러다 며칠 전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나 볼 법한 광경을 마주했다. 드라이버 앞에 두발로 선 개 한 마리가 앞발로 운전대를 붙잡고 거리를 질주하는 게 아닌가.
‘급정거를 하면 개가 떨어질 텐데…’
보는 사람의 마음만 불안할 뿐, 정작 당사자들은 무심한 듯 시크하게 계속 가던 길을 갔다.
요즘에는 헬멧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오렌지색, 하늘색, 핑크색 등 원색 헬멧을 쓰고 거리를 질주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볼 때면 ‘정말 이 도시는 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세기 이 도시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었다면, 21세기 호찌민의 상징은 원색의 헬멧을 쓴 채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격리기간 중 머물렀던 호텔 침실 벽에는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모습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호찌민의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표현한 그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호찌민의 오토바이 행렬은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제는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호찌민 사람들의 모습에서 생명력과 역동성을 느낀다.
며칠 전 폭우가 쏟아졌다. 장대비 속에서도 비옷을 입은 채 질주하는 호찌민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지금 이 도시가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김면중은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에 입문, 남성패션지, 여행매거진 등 잡지기자로 일한 뒤 최근까지 아시아나항공 기내지 편집장으로 근무했다. 올해 초부터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도시인 베트남 호찌민에 머물고 있다.
김면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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