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제2의 쿠팡’이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나올 수 있을까. 5년여 전 정부는 업계를 대상으로 나스닥 상장 준비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 바 있는데, 이제야 조금씩 미국 증시 상장 움직임이 보인다. 업계에서는 긍정적 신호로 보고 있다. 앞으로 나스닥 상장을 준비하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글로벌 제약사와의 인수합병(M&A)과 기술협력 사례가 활발해지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아직은 ‘초기 단계’라 섣부른 기대는 말아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기술 없이 나스닥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페니주’(1달러가 안 되는 동전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글로벌 임상’ 노린 전략적 진출…잠재력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라 유리
미국 나스닥 상장을 염두에 두는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은 열 곳 정도다. 주로 나스닥 상장사의 경영권을 확보하거나, 다른 기업과 공동으로 설립한 현지 합작사 등 미국 현지 법인을 상장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동아에스티 등 국내 대형 제약사부터 GC녹십자랩셀·SCM생명과학·엘앤케이바이오 등이 관심을 두고 있다.
동아에스티는 이미 나스닥에 상장한 미국 제약사인 뉴로보 파마슈티컬스(뉴로보)의 경영권 확보에 나섰다. 뉴로보는 미국 신약개발 기업 제이케이바이오파마솔루션스와 로이 프로만 하버드대 의대 신경과전문의가 2017년 9월 창업한 회사다. 동아에스티에서 도입한 천연물의약품이 주요 파이프라인이다. 지난 3월 동아에스티는 뉴로보 의결권 약 33%를 위임받았다고 밝혔다. 기존 지분 13%에 더하면 의결권은 46%까지 늘어난다.
무엇보다도 미국 현지 법인을 미국 증시에 진출시키려는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다. 자연살해세포(NK세포) 관련 기술을 보유 중인 아티바바이오테라퓨틱스는 9일 증권신고서를 제출했다. 이 기업은 GC녹십자랩셀의 미국 관계사로 지난해 말 기준 GC녹십자랩셀이 아티바 보통주 32.0%를 갖고 있다. SCM생명과학과 제넥신은 미국 현지에 합작회사 코이뮨을 세우고 나스닥 상장을 추진 중이다.
업계의 이러한 움직임은 ‘글로벌 임상’을 염두에 둔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기업의 경우 기술력이 갖춰져 있고 여력이 된다면 현지에 가는 편이 좋다. 글로벌 임상을 하려면 현지 스폰서가 필요하다. 현지 전문가들과 협업하게 되면 글로벌 임상을 준비하기 용이하고 미국 FDA(식품의약국) 허가를 받으면 그 가치는 국내 허가를 받는 것보다 훨씬 높아진다. 투자 성사 규모도 달라질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 시장이 성장성을 중시하는 투자 환경이라는 점도 국내 기업들에는 매력적인 지점이다. 이정규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대표는 “미국 나스닥 시장에서는 기업의 성장성을 높게 평가한다. 지금 당장은 매출이 나오지 않더라도 자금 수요가 많은 기업에 우호적인 시장이다. 나스닥 상장을 하면 후속 유상증자가 굉장히 활발히 진행되는 면도 있다”고 말했다. 나스닥에 상장한 쿠팡도 지난해 영업손실 5억 2773만 달러(약 5940억 원)를 기록했다. 그러나 미국 투자자들은 회사의 잠재력에 무게를 실었다.
이 대표는 △미국 현지 투자가들이 투자한 회사 △후기단계 개발 신약이 있고 미국과의 사업적 관계가 있는 회사 △플랫폼 기술을 가진 회사가 나스닥 상장에 유리하리라 내다봤다. 이 대표는 “10년 전만 해도 임상시험 개수가 몇 개인지를 중요하게 판단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플랫폼 기술, 다시 말해 ‘기반 기술’을 중요하게 보는 게 미국 시장 분위기다. 특정 기술로 향후 얼마나 많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지로 성장 가능성을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다른 제약업계 관계자는 “개인 맞춤형 약, 디지털 신약이 점차 주목받을 듯하다”고 말했다.
나스닥 상장은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이 ‘가야만 하는 수순’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미국 의약품 시장 규모는 우리나라보다 월등히 크기 때문이다. 의약품 시장조사기관 IQVIA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의약품 시장 규모는 5100억 달러(약 574조 원)에 달한다. 2014~2019년 연평균 성장률은 4.3%다. 같은 기간 한국 의약품 시장 평균 성장률은 7.3%이었지만, 시장 규모는 160억 달러(약 18조 원)다. 중국·일본·인도보다 뒤처진다. 중국과 일본 의약품 시장 규모는 각각 1410억 달러(약 158조 원), 870억 달러(약 97조 원)를 기록했다.
#시도는 긍정적…코리아 프리미엄 따지면 ‘필수 아닌 선택’
업계에서는 국내 기업의 나스닥 진출 현상을 긍정적으로 본다.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승규 부회장은 “국내 기업의 나스닥 상장 사례가 늘어나면 미국의 상징적인 기업들과의 협력, 인수합병도 증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아직은 합작회사나 투자회사를 나스닥에 상장시키는 등 간접적인 방법을 택하는 기업이 대부분인 ‘시작 단계’인 만큼 ‘업계 트렌드’가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다.
필수라기보다는 기업의 선택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가령 SK바이오팜은 당초 미국 나스닥 상장을 고려하다 지난해 7월 코스피에 상장했다. SK바이오팜 관계자는 “나스닥에서 코스피로 방향을 전환한 이유는 SK바이오팜 본사가 서울에 있고, 나스닥 상장 시 상장 유지비가 부담됐기 때문이다. 국내 바이오산업과 증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코스닥 상장을 계획 중인 한 바이오기업 관계자는 “국내 시장에 경쟁제품이 없기 때문에 굳이 나스닥 진출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에 붙는 ‘코리아 프리미엄’ 때문에 나스닥 상장이 활발히 이뤄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우리나라에서 상장해야 주가가 훨씬 높게 형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반론도 있다. 이정규 대표는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주가가 높으면 증자가 안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적정 가격을 넘어서서 몸집이 과대하게 부풀려지다 보면 인수 자체도 성사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술력’을 얼마나 갖췄는지가 나스닥 상장 혹은 기업 성장의 핵심이라는 점이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 약학대학 교수는 “나스닥에 가서 인정받고 자본을 유치하려면 본질은 기술이다. 모든 기업에게 기회는 열려 있지만 성공 여부는 경쟁력 있는 기술 자체에 달렸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도 “나스닥에는 워낙 많은 바이오기업이 상장돼 있다. 그 안에서 주목을 받으려면 특색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 ‘페니주’가 돼 상장폐지 위험성도 배제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김명선 기자
line23@bizhankook.com[핫클릭]
·
56층 래미안 첼리투스 낳은 오세훈의 '한강 르네상스' 부활할까
·
[부동산 인사이트] 오세훈 서울시장 부동산 정책 실현 가능성은?
·
'배그 신화' 크래프톤 상장 기대감에 들썩이는 장외주
·
한국 10대 제약·바이오기업 2020년 성적 총결산
·
셀트리온·에이치엘비 매수 나선 동학개미 '한국판 게임스탑'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