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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재계 7위였던 금호그룹과 박삼구 회장은 어떻게 몰락했나

2006년 대우건설, 2008년 대한통운 10조 원 투자해 인수…과도한 차입으로 그룹 해체에 몰려

2021.04.06(Tue) 17:50:13

[비즈한국] 금호아시아나그룹은 1946년 택시 2대로 시작해 60년 만에 재계 7위에 이름을 올렸다. 1946년 광주택시, 1948년 광주여객자동차(금호고속)를 잇달아 세우며 운수업에 진출했고, 건설업과 항공업을 통해 성장했다. 외환위기도 잘 극복했지만 4대 회장인 박삼구 전 회장에 이으러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위기에 몰렸고, 현재는 사실상 해체되어 중견기업으로 쪼그라들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4대 회장. 사진=비즈한국 DB

 

#박인천 창업주와 아들들의 형제경영으로 성장한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인천 창업주는 1901년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태어났다. 사업에 관심이 많던 박인천 창업주는 당시 목화 장사 등 여러 사업을 해보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장사를 포기하고 순사 시험에 합격해 간부까지 승진했다. 박인천 창업주는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연패중이라는 기사를 보며 혼잣말로 “이러다가 일본이 정말 패망하는거 아냐”라고 중얼거렸는데, 이를 들은 일본인 형사가 듣고 상사에게 보고하며 파면됐다. 

 

박인천 창업주가 파면당하고 2개월 후에 일본은 실제로 패망했는데, 파면으로 인해 반민특위 색출대상에서 제외되는 행운을 거머쥐기도 했다. 교통과에 근무하며 운송업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46세의 나이에 택시와 버스사업에 진출했다. 1970년대에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건설되며 광주고속(현 금호고속)을 설립해 사업을 확장했다. 

 

박인천 창업주는 운송업에 이어 금호타이어와 금호건설을 설립해 사업을 확장했지만 건설업은 불경기로 인해 박인천 창업주가 사망하기 전까지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1984년 박인천 창업주가 사망하며 장남 박성용 씨가 그룹 회장을 맡게 된다. 특이하게도 박성용 회장은 동생인 박정구, 박삼구, 박찬구와 함께 ‘형제공동경영합의서’를 작성했다. 

 

합의서에는 △회장직 65세를 넘기지 않을 것 △4가계의 합의로 추대 △10년을 넘기지 않을 것 △4형제가 지분 동일하게 보유할 것 등의 내용이 적혔다. 박성용 회장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당시 정부에서 제2민항사 설립을 추진했고, 박성용 회장이 이끌던 금호그룹이 선정돼 1988년 12월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했다. 이후 1990년대 건설호황이 이어지며 금호건설이 크게 성장했다. 1996년 박성용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고 동생 박정구 회장이 그룹을 물려받는다. 

 

박정구 회장의 경영능력은 이미 입증된 상태였다. 1981년 한 해 적자 50억 원에 달하던 금호타이어 사장에 올라 2년 만에 120억 원의 흑자를 내는 능력을 보였으며 금호타이어를 세계 10대 타이어 반열에 올려놨다. 국내 타이어업체 중 유일하게 중국에 진출해 성공을 거뒀다. 박정구 회장은 사업 통폐합을 통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재무구조를 정비했으며 재계 순위 10위에 오르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2002년 폐암으로 사망하면서 형제공동경영합의서에 따라 박삼구 회장이 4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형제공동경영합의서 수정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몰락

 

박삼구 회장은 2005년 박성용 2대 회장이 사망한 후 형제공동경영합의서를 수정하며 형제간의 합의를 깼다. 합의서 중 65세를 넘기지 않는다는 내용과 최장 10년까지만 회장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을 삭제했고, 의견이 상이하면 다수결원칙과 연장자 의견을 따른다는 내용을 신설했다. 2006년 그룹 분할 해체 금지 조항 및 2008년 합의서를 위반한 경우 소유 주식의 50% 금액을 다른 가계에 보상한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박삼구 회장은 2006년 건설업을 주력 사업으로 키울 생각으로 당시 국내 최대 건설회사인 대우건설의 주식 72.1%를 6조 4255억 원에 인수했다. 당시 업계에서는 대우건설의 인수 가치를 3조 원으로 예측하고 있었기에 2배가 넘는 인수 금액에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문제는 6조 원이 넘는 금액의 조달 방법이었다. 3조 원가량은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통해 차입했고, 3조 50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은 사모펀드 등을 통해 끌어모았다. 사모펀드를 통해 조달한 금액은 주식 의결권을 위임 받는 대신 3년 후 1주당 3만 4000원에 되사는 풋백옵션을 체결했다. 당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자본 총액은 약 3조 원이었다.

 

박삼구 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08년 4조 1000억 원을 투입해 대한통운을 인수했다. 이를 통해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재계 7위에 입성했다. 하지만 차입에 의존한 외형 확장은 그룹의 유동성 위기를 부를 수 있어, 동생인 박찬구 화학부문 회장은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의 인수를 반대했지만 박삼구 회장을 멈출 수 없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며 주가는 폭락했고, 대우건설도 이를 버텨낼 순 없었다. 인수 당시 1만 3000원이던 주가는 1만 원까지 하락했고, 풋백옵션 날짜는 다가오고 있었다. 

 

2018년 5월 4180억 원에 매각한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옥. 사진=비즈한국 DB


결국 2009년 12월 재매입해야 할 주가를 감당할 수 없었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우건설을 한국산업은행에 매각했고, 금호생명, 금호렌터카, 대한통운도 매각했다. 그래도 부족한 차입금은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옥 매각과 박삼구 회장 개인 재산까지 담보로 제공하며 상황을 모면했다. 한편 인수과정에서 갈등을 겪은 박찬구 회장은 금호산업의 주식을 매각한 후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매입해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분리해 나갔다. 

 

2017년 4조 6000억 원에 달하던 차입금은 2018년 12월이 되어서야 3조 원으로 줄었다. 하지만 모든 부채가 마무리 된 것이 아니었다. 2019년 3월 아시아나항공이 삼일회계법인으로부터 ‘한정의견’을 받으며 다시 문제는 불거졌다. 2018년 12월 기준 아시아나항공의 자산 약 8조 원 중 7조 원이 부채로 부채비율은 600%가 넘어갔다. 박삼구 회장은 2019년 3월 사퇴하고 경영권을 포기했다. 2019년 4월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결정됐다. HDC그룹이 아시아나항공 인수 의사를 밝혔지만 2020년 4월 HDC그룹이 인수를 연기하며 그룹의 모태격인 금호고속마저 유동성 위기에 빠지며 채권단이 관리하게 됐다. 

 

이후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겠다고 밝혔으며 아시아나항공이 빠지게 되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금호고속과 금호산업만 남게 되며 중견기업으로 남게 된다. 2020년 12월 8일 금호그룹은 전략경영실을 해체하기로 밝혔고, 사실상 그룹 해체 수순을 밟게 됐다. 

 

2020년 2월 매각한 박삼구 전 회장 자택. 사진=비즈한국 DB


박삼구 전 회장은 현재 자택을 매각한 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단독] 박삼구 전 금호 회장, 유엔빌리지 자택 268억에 매각). 박삼구 전 회장의 장남인 박세창 금호건설 사장이 10억 원을 투자해 금호건설의 지분 0.3%를 매입하며 지배력 강화에 힘쓰고 있다. 박세창 사장은 금호고속의 지분 28.6%를 소유한 2대 주주로 금호그룹의 명맥을 이어나가려 하고 있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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