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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다시 새겨보는 '부활'의 의미, 서울의 천주교 순교성지

신앙 위해 수많은 이들 스러진 서소문·새남터·절두산, 지금은 기념관 조성해 기억

2021.04.06(Tue) 11:15:47

[비즈한국] 엊그제(4월 4일)는 부활절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날. 코로나 탓에 특별한 행사도, 부활절의 상징이 된 알록달록 예쁜 달걀도 없었지만 방역수칙 지키며 교회에 모인 신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새겼다. 100여 년 전 우리 땅에도 부활을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신앙이 있건 없건, 조금은 경건한 마음으로 신념을 위해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며 부활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건 어떨까. 

 

순교자들의 모습이 새겨진 절두산 순교성지 기념비.​ 이곳에서는 17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다. 사진=구완회 제공

 

#대한민국 최대의 순교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의 순교성지 중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방문한 것은 이곳이 대한민국 최대의 순교성지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진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시대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조선에서는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으로 인한 죄인들을 처형하였다. 사형수는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었는데, 모반죄는 형장이 일정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사형수들은 대부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이는 유교 경전인 오경 중 하나인 ‘예기’의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 이곳은 바로 사직단(현재의 사직공원) 우측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대한민국 최대의 순교성지이다. 사진=구완회 제공

 

조선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후 서소문 밖 처형장은 가장 중요한 순교터가 되었다.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서학을 믿는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게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한 것이다. 

 

순교는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을 비롯해 이승훈, 최창현, 강완숙 등 2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뒤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100명에 가까운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이후 근린공원이 되었고 공원 안에 순교자현양탑이 세워졌다. 2019년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개관과 함께 공원도 서소문 역사공원으로 새단장했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곳, 새남터 순교성지

 

한강변의 새남터 순교성지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곳으로 유명하다. ‘새남터’는 이곳이 북쪽 한강변의 노들 나루터 인근에 위치한 얕은 모래 언덕이라 억새와 나무가 많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곳은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이 무예를 단련하는 연무장과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때 서소문 밖 처형장에서 주로 평신도들을 처형했다면, 이곳에선 성직자나 지도층 신자들의 처형이 이루어졌다. 신유박해 때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의 첫 순교자가 되었고, 기해박해 때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순교했다.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부가 처형을 당했으며, 병인박해 때는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처형되어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강변의 새남터 순교성지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곳으로 유명하다. 새남터 순교성지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동상. 사진=구완회 제공

 

현재 새남터 순교성지에는 새남터 기념성당이 자리한다. 1987년에 완공된 성당은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 위에 3층 탑을 쌓은 특이한 모양이다. 성당 안의 새남터 기념관에서는 이곳에서 순교한 14인의 동판화와 함께 이들의 유해를 모셔 놓은 성인 유해실, 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당했던 고문과 처형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당시 사용한 형구 등을 볼 수 있다. 성당 주변에는 예수가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순교자들의 머리를 자른 산, 절두산 순교성지

 

한강변 양화진의 절두산 순교성지는 이름 그대로 ‘머리를 자른 산’이란 뜻이다. 절두산이 처음부터 이런 이름으로 불린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에는 ‘가을두’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원래 우리 말의 ‘들머리’가 변화된 말로 보인다. 불쑥 솟은 자세가 누에와 닮았다 하여 ‘잠두봉’이라 불리기도 했다.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머리를 잘렸다고 해서 이 지역 사람들이 절두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 순교자 헌양회가 이 지역 땅을 구입하면서 절두산이란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가 서소문 밖이나 새남터에서 이곳 절두산으로 바뀐 것은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거슬러왔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프랑스의 침략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조선 사람들이 프랑스 함대의 물길 안내원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프랑스 함대가 정박한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그들의 책임을 확실히 묻고 일벌백계의 본보기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모두 17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다. 현재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절두산 성지에는 지난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절두산 순례성당과 순교기념관이 지어졌다. 순교기념관 안에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이 있다. ​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지어진 절두산 순례성당. 사진=구완회 제공

 

<여행메모>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칠패로 5 

△문의: 02-392-5018 

△이용시간: 24시간, 설·추석 당일 휴무(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관람시간은 09:30~17:30, 월요일 휴관)

 

새남터 순교성지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80-8 

△문의: 02-716-1791 

△이용시간: 24시간, 연중무휴(새남터 기념성당은 미사 시작 1시간 전부터 30분 정도 관람 가능)

 

절두산 순교성지 

△위치: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6 

△문의: 02-3142-4434 

△이용시간: 24시간, 연중무휴(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관람시간은 09:30~17:00, 월요일 휴관)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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