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K팝 산업의 급속한 성장은 수많은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수혜를 입은 곳은 플랫폼 기업이다. 네이버와 다음에는 팬 커뮤니티가 만들어졌고, 트위터를 통해 팬들은 정보를 주고받았으며, 인터파크에서 콘서트와 팬미팅 티켓을 사고, 인스타그램에는 아이돌과 팬들이 촬영한 이른바 ‘직찍’ 사진이, 유튜브와 틱톡에는 각종 커버 영상이 쉴새없이 올라온다.
연예기획사는 생각했다. “우리가 많은 돈을 투자하며 힘들게 키운 아이돌인데, 왜 돈은 다른 이들이 벌어가는거지?” 과거 회사가 영세했을 때는 그게 당연했고 막강한 홍보 효과에 고맙기도 했다. 90년대 음악 방송에 출연시켜주는 공중파 방송국을 극진히 모신 것처럼.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K팝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막대한 자본력을 축적한 연예 기획사는 이제 직접 플랫폼을 가져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연예기획사의 이러한 움직임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나마 연예기획사가 주도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던 아이돌과 팬의 오프라인 만남이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더 이상 콘서트와 팬미팅으로 수익을 낼 수 없게되자, 플랫폼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여기에 K팝 산업이 글로벌화되면서 국경의 장벽까지 뛰어넘어야 할 필요까지 생겼다. 하이브(구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위버스’, SM엔터테인먼트의 ‘리슨(Lysn), 버블’ 등은 그렇게 탄생했다.
MZ세대 소비자는 크게 두 가지 특징적인 소비 성향을 보인다. 하나는 모두가 합심해서 이른바 ‘돈쭐’을 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욕하면서 돈쓰기’다. ‘욕하면서 돈쓰기’의 양대산맥으로는 ‘아이돌 덕질’과 ‘게임 현질’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게임사 엔씨소프트가 최근 선보인 K팝 팬 플랫폼 ‘유니버스’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놀이터가 하나의 거대한 테마파크로 바뀌고 있는 지금 상황이 K팝 팬들에게 달갑기만 한 건 아니다. 아직은 서비스 초기라는 점을 감안해도, 반응은 긍정적이라기 보다는 부정적인 쪽에 가깝다. 위버스는 지난해 초 출시 초기 팬덤 사이에서 폐지 운동이 일어났고, 유니버스는 ‘기괴하고 소름돋는다’는 혹평이 나오기도 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지난 2020년 6월 K팝 팬 플랫폼 ‘블립’을 선보인 스페이스오디티의 김홍기 대표에게 물었다.
“아이돌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거액의 투자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돌도 그렇지만 연예기획사 대표도 인생을 거는 건 마찬가지다. 대박이 날 확률도 대단히 낮다. 어떻게든 대중의 주목을 받으면 그 이후로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데, 아이돌은 사람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초창기에는 더 많은 팬들을 만날 수 있도록 기수나 유닛 개념도 도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요즘은 귀여운 캐릭터를 만들거나 홀로그램 공연, 인공지능 부캐 등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팬 플랫폼 혹은 메타버스 역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아이돌과 팬을 더욱 많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는게 핵심이다.”
연예기획사도 기업인 이상 어렵게 키운 아이돌을 활용해 더 많은 수익을 올리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수익의 원천은 당연히 팬덤이다. 팬들이 음원을 듣고 공연 티켓을 사고 굿즈 등을 사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다른 플랫폼을 통하지 않고 자체 플랫폼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수익은 더욱 안정적으로 극대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른바 ‘덕질’을 즐기는 팬들의 욕구는 뭘까. 김 대표는 팬덤의 욕구는 좀 더 다양하고 섬세하며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가령 게임의 경우에는 스스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하지만 팬덤은 자신이 최고의 팬이라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별로 없다. 그보다는 ‘어덕행덕(어차피 덕질할 거 행복하게 덕질하자)’이라는 말처럼,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덕통사고(우연히 갑작스럽게 아이돌이 좋아짐)로 시작해 아이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한다. 이후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각종 정보를 교환하며 동질감을 느끼는 것을 즐긴다. 덕질에 더욱 빠져들게 되면 아이돌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의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응원을 넘어 자신의 아이돌을 거룩하고 성공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하는 거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리고 싶어하는 연예기획사의 욕구와 자신이 덕질하는 아이돌이 더 잘되기를 바라는 팬덤의 욕구는 뭔가 비슷하면서도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양쪽 다 아이돌이 잘돼야 하는 건 맞는데, 그 과정에서 한 쪽은 돈을 버는 입장이고 한 쪽은 돈을 쓰는 입장이라서 그렇다.
이를 팬 플랫폼 사업에 대입해보면 팬덤이 왜 연예기획사나 게임사 주도의 플랫폼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팬덤은 자발적인 마음으로 움직일 때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것이 자신이 덕질하는 아이돌을 기쁘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돌이 속한 연예기획사나 그들을 활용한 기업의 수익으로 돌아간다고 생각될 때 ‘깐깐한 소비자’로 돌변한다. 결과적으로 기업에 돈이 흘러가는 건 같지만, 결코 같지 않은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브의 ‘위버스’나 엔씨소프트의 ‘유니버스’는 팬들이 쉽게 외면하기도 어려울 만큼 강력하다. 일단 소속되거나 혹은 계약된 아이돌이 만드는 오리지널 콘텐츠가 끊임없이 생산된다. 팬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아이돌과 더 소통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다. 스케줄 정보나 콘서트 티켓, 각종 굿즈 구입 등도 모두 이곳에서 독점적으로 이뤄진다. 심지어 위버스는 세계 최고의 아이돌 그룹 BTS로도 부족해 블랙핑크가 소속된 YG엔터테인먼트와 손을 잡고, 네이버 브이라이브와 통합하는 등 몸집이 더욱 커졌다.
스페이스오디티의 팬 플랫폼 ‘블립’은 소속되거나 계약된 아이돌이 없다. 자본력이나 개발력 규모도 하이브나 엔씨소프트와 경쟁하기 힘든 수준이다. 다만 등록된 52팀의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팬덤이 필요한 정보를 자동으로 알아서 찾아주고 현황을 보여주며, 팬덤 스스로 정보를 공유하고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마케팅 비용 없이 입소문 만으로 누적 다운로드 20만 건, 이용자 당 월 평균 사용시간 100분을 기록하며 K팝 팬 플랫폼 3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비결이 궁금하다.
“소속된 아이돌이 있고 없고는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있다면 아이돌을 활용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소속된 아이돌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아이돌과 협업하고 무한하게 확장하며 오로지 팬들을 진정성을 갖고 돕는다. 팬덤의 크기를 정량화한 케이팝 레이더나 팬이 직접 완성해가는 스케줄, 아티스트보드 등이 그것이다. 입덕은 결코 쉽지 않다. 덕질을 계속 유지하는 것 또한 그렇다. 블립은 그런 팬들을 즐겁고 편리하게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식당 하나 없는 ‘배달의민족’이나 인테리어 시공 경험 한 번 없는 ‘오늘의집’ 처럼, 플랫폼 비즈니스가 반드시 모든 것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비즈니스의 성패는 상품의 가치가 아니라 소비자가 얼마나 만족하는가에 달렸기 때문이다.
봉성창
기자
bong@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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