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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삼성도 탐냈던 기아그룹의 몰락

1960년대 일본 마쓰다와 기술제휴로 삼륜차 생산 시작…IMF 위기로 현대그룹에 인수돼

2021.03.24(Wed) 13:18:57

[비즈한국] 1979년 10월 한국 최초 실질적인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 기아그룹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운영하며 국민들에게 모범 기업으로 인식됐다. 김철호 기아그룹 창업주의 손자인 김석환 삼천리자전거 회장이 기아그룹을 맡지 못하겠다고 말하며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된 것.경영 분리 때문에 기아그룹은 경영권 공격에 취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특히 자동차산업에 진출하려던 삼성그룹이 기아그룹을 탐내며 주식 매입에 나서 충돌하기도 했다. 기아그룹이 부도에 몰렸을 때 정작 삼성그룹은 인수할 여력이 없었고, 결국 국제입찰을 통해 현대자동차에 매각됐다. 

 

1994년 5월 25일 아산공장에서 열린 기아자동차 창사 50주년기념식에서 김선홍 회장이 격려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오너 기업으로 시작했던 기아그룹

 

기아그룹은 자동차 전문 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자전거로부터 시작된다. 김철호 창업주는 1905년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나 17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자전거 기술을 배웠고, 25세의 나이에 사장에 오를 정도로 탁월한 경영 능력을 갖고 있었다. 

 

김철호 씨가 일하던 삼화페인트가 경제 악화로 문을 닫게 되자 퇴직금 대신 기계설비를 받아와 작은 공장을 새롭게 차리고 운영했다. 사업은 점차 확대됐지만 일본의 전쟁 패배를 예측한 김철호 씨는 회사를 정리한 후 1944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철호 씨는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에서 삼천리자전거의 전신인 ‘경성정공’을 차렸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경성정공은 부산으로 자리를 옮겼고, 1952년 4월에 기아산업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곳에서 국내 최초 자전거인 ‘3000리호’를 생산했다.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위치한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전경. 사진=임준선 기자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온 기아산업은 자전거와 리어카를 생산하다가 1959년 일본 혼다와 오토바이 생산 기술제휴를 맺고, 뒤이어 마쓰다와 삼륜차 생산 기술제휴를 하게 된다. 3년 후 오토바이 ‘기아혼다 C-100’, 삼륜차인 ‘기아마스터 K-360’을 생산해냈고, 판매 수익으로 1970년 국내 최초 일관공정 시스템을 확보한 소하리 공장 착공에 나섰다. 이후 소하리 공장은 연 2만 5000대의 차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2세 경영 도중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한 기아그룹

 

자전거와 이륜차, 삼륜차의 토대를 마련한 김철호 창업주는 1973년 11월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김상문 회장이 기아그룹을 이끌게 됐다. 1976년 김상문 회장은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해 승합차, 버스, 트럭 등을 생산했다. 

 

이처럼 창업주 가족이 경영을 하던 기아그룹은 돌연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1979년 김상문 회장의 아들인 김석환 씨가 경영권 포기 의사를 밝혔고, 1980년 들어 전두환 정권의 산업합리화정책으로 승용차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자 김상문 회장은 소유 지분 25%를 종업원지주조합에 출연했다. 이후 김상문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직함만 유지하고 당시 민경중 아시아자동차 사장을 그룹 회장, 김선홍 기아기공 사장을 기아차 사장으로 선임했다. 1985년 김석환 회장이 이끄는 삼천리자전거는 기아그룹과 완벽하게 독립하게 된다.

 

김선홍 기아차 사장은 1990년 기아그룹 회장에 올라 현대자동차에 인수되기 전까지 회장을 유지한 인물로 평범한 직원으로 입사해 회장까지 올라간 샐러리맨의 우상이기도 했다. 엔지니어들이 잡지 못한 자동차의 결함도 잡아내며 김철호 창업주의 눈에 들었다고 전해진다. 

 

#기아그룹의 투자 실패와 겹친 악재들

 

1987년 자동차공업 산업합리화정책이 해제되며 김선홍 회장은 승용차 출시에 박차를 가한다. 프라이드, 콩코드 등의 승용차를 연달아 출시하며 1988년 자동차 생산 100만 대를 돌파하게 됐다. 1993년 도심형 SUV인 스포티지 등을 출시하고 해외시장에 진출했고, 1995년 100만 대의 자동차를 수출했고, 1996년엔 자동차 생산량 500만 대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1996년 기아그룹은 자동차 수출 30억 달러, 재계 순위 8위에 올랐다. 1997년 기아그룹은 기아중공업, 기아특수강, 기산 등 28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5만 5000명의 직원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장세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는데, 1993년 삼성그룹이 자동차산업에 진출하며 기아차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기아그룹 김선홍 회장도 지분을 1%밖에 소유하지 않아 경영권 공격에 취약했는데, 삼성그룹은 1993년 6월부터 9월까지 8%의 지분을 확보하며 국내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하지만 기아그룹과 여론의 질타를 받으며 지분 일부를 매각하기도 했다. 

 

기아그룹이 경영권 방어에 급급하던 사이 계열사들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1992년 아시아자동차는 브라질에 자동차 판매 법인을 세우고 ‘기아 타우너’, ‘기아 토픽’을 브라질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5년 브라질 정부에서 수입차 관세를 70%로 올려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브라질 현지에 공장을 세우려 했지만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아시아자동차 브라질 합작 회사의 대표이사였던 스토닉 전 씨는 아시아자동차를 상대로 4000억 원의 사기행각을 벌였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또한 기아그룹은 1990년에 들어서며 국내 자동차 시장이 과열되며 기아특수강, 건설업체인 기산 등에 많은 투자를 진행했다. 하지만 철강업계도 공급과잉 상태였고, 부동산 경기침체로 기산도 연일 적자를 기록했다. 1996년 아시아자동차 294억 원 적자, 기아특수강은 895억 원 적자, 기산은 67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 3개사의 적자 금액은 기아그룹 전체 적자의 약 97%에 달했다. 기아자동차가 70억 원의 이익을 냈지만 계열사들의 적자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현대자동차에 인수된 후 운영되다가 최근 새로운 로고가 걸린 기아자동차. 사진=임준선 기자


심지어 1997년 4월 삼성자동차 산업조사팀이 자동차산업 관련해 작성한 17쪽짜리 내부 보고서가 공개되며 기아그룹을 더욱 옥죄었다. 보고서는 현대와 대우에서 생산하는 차량을 제외하고 다른 국내 자동차 업체가 2000년대 성장 한계에 부딪힐 것이라고 단정했고, 당시 금융권도 자금난에 처한 기아그룹에 추가 대출을 해주기 꺼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그룹은 여러 악재 속 금융위기가 닥치며 1997년 7월 부도를 맞았고, 1998년 4월 법정관리에 돌입했다. 정작 기아그룹을 호시탐탐 노리던 삼성그룹은 당시 인수 여력이 없었고, 기아차는 1998년 10월 현대그룹에 낙찰된다. 기아차, 아주금속공업, 카스코, 본텍, 위아, 위스코 등은 현대그룹으로 합병됐고, 기아특수강은 세아그룹으로 편입됐다. 나머지 계열사들은 모두 청산되는 등 사라졌다. 

 

기아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간 1998년 6월 김선홍 회장은 기아특수강 등 변제능력이 없는 4개 계열사에 2조 4000억 원의 지급보증을 서고 1조 1000억 원을 대여한 혐의, 공금 523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1999년 6월 징역 4년이 확정돼 수감생활을 했지만 2000년 7월 지병 악화를 이유로 형집행정지 조치를 받았으며 2002년 말 특별사면을 받았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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