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어릴 때는 친구 같은 사이의 모녀 관계를 부러워했다. 중학생 때 친구네 어머니가 친구와 함께 만화책을 본다는 소리를 듣고 그 친구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우리 엄마는 부모는 부모요, 자식은 자식이다 하는 분이었고 만화책은 학습만화 외엔 그리 권장할 만한 종류가 아니라 믿는 분이었으니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니 앤 조지아’에는 내가 어릴 적 부러워했던 친구 같은 엄마를 지향하는 조지아(브리안 호웨이)가 나온다. 문제는 딸인 지니(안토니아 젠트리)는 그런 엄마가 영 달갑지 않다는 거다.
‘지니 앤 조지아’는 열다섯 나이에 미혼모로 지니를 낳은 엄마 조지아와 이제 열여섯 살이 되는 지니, 그리고 지니와 아빠가 다른 아들 오스틴으로 구성된 가족이 웰스베리(Wellsbury)라는 조용한 부자 동네로 이사 오면서 시작한다. 이들 가족의 이사는 한두 번이 아니다. 지니의 내레이션에 따르면 엄마 조지아는 남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헤어질 때마다 미련없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하곤 했다. 덕분에 지니와 오스틴은 잦은 전학으로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지니에겐 조지아란 존재 자체가 버겁다. 열다섯에 지니를 낳은 조지아는 아직 30대 초반으로, 새하얀 피부와 눈부신 금발 등 한눈에 시선을 끄는 화려한 외모를 지녔다. 자신의 외모와 매력을 적극 활용해 사람들 사이를 금세 파고드는 조지아에게 남자들을 유혹하는 건 손가락 튕기기만큼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가공할 친화력만큼 빠르게 남자를 만났다 헤어지는 것도 조지아의 특기. 지니는 엄마의 연애 편력에 따라 구름처럼 떠다니는 자신의 처지가 싫다. 다른 아이들처럼 한 곳에 정착해 친구와 우정을 주고받고, 남자친구도 사귀고 싶은데 말이다. 남자아이와 눈빛을 주고받는 것만 보고 피임약을 처방받으려 산부인과에 데려가는, 다른 친구들은 “너네 엄마 정말 쿨해!”라고 찬사를 던지지만 자신에겐 유별나기 짝이 없는 엄마의 모습도 넌더리 난다.
게다가 지니에겐 엄마 외에 또 하나의 굴레가 있다. 친아빠가 흑인이기에 지니는 ‘백인이라 보기엔 까맣고, 흑인이라기엔 너무 하얀’ 피부색을 지닌 혼혈이다. 이사 온 웰스베리에서 이웃집 소녀이자 학교의 ‘핵인싸’ 맥신(사라 와이즈글라스)이 지니를 마음에 들어 하며 자신의 그룹에 끼워줘 난생 처음 친구 무리가 생겼지만 흑인이라고는 10명도 채 되지 않는 이곳에서 지니의 정체성은 언제나 그렇듯 모호하다. 첫날부터 지니가 영문학 심화반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할 거란 편견을 갖고 대하던 기튼 선생의 존재가 부유한 백인 위주 마을에 떨어진 지니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21세기에 인종차별이라니, 너무 올드한 거 아니냐고? 에이, 우리는 이미 첫 흑백 혼혈 왕족으로 입성한 메건 마클이 낳을 아들의 피부색이 얼마나 어두울 것인지 영국 왕실이 우려했다는 폭탄 인터뷰를 들었지 않나.
‘지니 앤 조지아’는 이방인이던 지니가 웰스베리에 적응하며 겪는 갖가지 문제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새아빠의 학대를 피해 가출한 순간부터 하루도 인생이 평탄한 적이 없던 엄마 조지아의 비밀을 조명한다. 전남편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거액의 유산을 받게 되어 웰스베리로 이주한 조지아는 전남편의 전처가 유산 상속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돈이 곤궁한 처지다. 어찌어찌 웰스베리의 시장이자 매력적인 싱글남인 폴 랜돌프(스콧 포터)와 레스토랑 사장 조(레이몬드 애블랙)의 도움으로 시장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고, 시장과 연애까지 하게 되지만 숨겨둔 비밀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전남편 살해 의심도 받고 있는 중이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과거의 조지아 행적을 보다 보면 이 복잡다단한 인물에게 응원을 던져야 할지 질책을 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지니 앤 조지아’는 지니의 적응기와 더불어 지니가 친절한 모범생 헌터(메이슨 템플)와 ‘나쁜 남자’의 전형인 맥신의 쌍둥이 남매 마커스(펠릭스 말라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하이틴물의 흐름을 따르면서 한 겹 한 겹 파헤쳐지는 조지아의 인생과 비밀을 미스터리와 스릴러 느낌으로 얹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타이틀처럼 지니와 조지아의 모녀 관계다. 조지아가 지닌 비밀들은 자신이 어릴 적 받지 못했던 것들을 지니에게 누리게 해주고 싶은 엄마의 당연한 욕구로 인해 파생된 결과들이기도 하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를 이해할 수 없는 지니는 과연 시즌2에서 조지아를 이해하게 될까? 10화로 끝난 시즌1은 현재 넷플릭스 TV쇼 시청 1위를 기록 중이다(3월 15일 Flixpatrol 기준). 이 모녀의 이야기가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먹혔다는 소리다.
상반된 성격의 미혼모와 딸 이야기라는 점에서 ‘지니 앤 조지아’는 2000년대 초반 인기를 끌었던 미드 ‘길모어 걸스’를 떠올리게 한다. 시청자들 또한 ‘길모어 걸스의 매운맛 버전’이라고 부르고 있으니까. 미국 대중문화의 훌륭한 지침서 역할을 했던 ‘길모어 걸스’처럼 ‘지니 앤 조지아’도 미국 대중문화의 여러 요소가 곳곳에 버무려져 있다. 비록 지니와 친구들에겐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레트로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다는 게 40대인 나에겐 못내 슬프지만, 팝을 비롯한 미국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지니 앤 조지아’를 보는 재미가 자못 쏠쏠할 것이다.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매력적이다. 커튼을 잘라 드레스를 만들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더라도 자신의 배고픔을 달래는 게 중요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뺨치는 생존자 조지아의 매력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 퇴폐미 가득한 마스크로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게 만드는 마커스 역의 펠릭스 말라드는 또 어떻고. 4차원 매력 가득한 레즈비언 맥신과 다 갖춘 것 같지만 대만계 미국인으로 지니 못지않게 정체성의 문제를 겪고 있는 헌터 등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곱씹어 볼 만하다.
단, 모녀의 이야기라고 해서 섣불리 엄마와 함께 보려고 들진 말자. 남자친구가 입으로 만족시켜준 경험을 엄마에게 털어놓는 ‘매운맛’이라고.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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