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여러 차례 자금난에 시달렸지만 극복했고, 원료부터 제품까지 생산 가능한 공장을 갖추며 재계 21위에 이름을 올렸던 그룹. 고합그룹은 석유화학, 화합섬유를 바탕으로 약 31년간 위기와 성장을 반복하며 재계에 안착했다. 하지만 고합그룹은 튼실해 보이는 외형과 다르게 속은 곪아 썩어갔다. 외환위기를 맞으며 고합그룹은 제1호 워크아웃 기업으로 결정됐고, 대우그룹 다음으로 많은 공적자금이 투입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섬유원료부터 제품의 수직계열화 완성까지
1932년에 태어난 장치혁 씨는 평안도 연변에서 태어났다. 장치혁 씨는 1945년 13세의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월남해 1958년 사업에 뛰어든다. 처음엔 서울 대방동에 견직기 5대를 돌리는 작은 공장을 차렸지만, 화재로 공장 운영이 불가능해졌다. 장치혁 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수정 채굴 사업에 뛰어들어 돈을 모았다.
1966년 1월 장치혁 씨는 1000만 원으로 고합그룹의 모태인 고려합섬을 김종하 씨와 함께 설립했다. 1968년 말 고려합섬은 하루 2.5톤의 폴리프로필렌파이버를 생산하는 업체로 자리 잡았고, 1972년에는 나일론 생산시설도 갖추게 된다.
이때까지 작은 회사에 불과하던 고려합섬은 1976년 업계에 이름을 알렸다. 당시 국내 나일론 시장은 일본산이 자리잡았는데, 고려합섬에서 나일론 종합플랜트를 최초로 국산화하며 일본산 나일론 제품을 몰아내게 된다. 여기에 1970년대에 개발한 해피론의 인기가 더해지며 설립한 (주)해피론을 1982년 ‘고합상사 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꾸고 자본금을 10억 원에서 20억 원으로 늘렸다. 이후 고려합섬 산하 해외지사를 고합상사로 옮기며 총 10개의 해외지사망을 마련해 수출에 박차를 가한다.
고합그룹은 1981년 1억 6600만 달러를 수출 목표로 잡았는데, 1982년에 들어선 2억 8800만 달러로 늘릴 정도로 지속 성장했다. 장치혁 회장은 화섬 원료 공장을 준공하며 석유화학 부문을 떼어내 고려종합화학을 설립했다. 1988년 고려종합화학은 폴리에스테르의 원료인 TPA(Terephthalic Acid, 테레프탈산) 사업에 진출하며 원료부터 제품까지 만들 수 있는 체제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 수직계열화를 완성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가 강행됐고, 고합그룹은 자금난에 시달렸다. 울산에 600억 원을 투자해 TPA공장을 건설한 것과 불황, 유가 하락 등이 겹치며 1985년 부도 위기까지 맞았다. 주거래은행인 한일은행은 고려종합화학을 매각하라고 설득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행히 1986년 화섬업 호황기에 접어들며 위기를 버텨낼 수 있었다.
#장치혁 회장의 사업다각화와 대북 사업 진출
호황을 맞으며 고합그룹은 부채비율을 많이 낮출 수 있었다. 720%에 달한 부채비율은 1987년 468%까지 내리며 개선했고, 자기자본비율도 12.1% 17.1%로 소폭 증가했다. 성장과 위기를 동시에 겪은 장치혁 회장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1991년 전자, 통시, 플라스틱 자재 유통 등으로 사업다각화를 추진했다.
1994년 이스턴 전자통신을 인수해 주문형비디오, 초고속통신망 관련기기 생산 및 정보통신 서비스 등의 사업에 진출했고, 자동차 내장용 부직포 공장을 건설해 이탈리아, 일본 기업과 제휴해 유통업에 진출하기 위한 포석도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의료 사업부 신설 및 내수 의류 분야 진출을 위해 예씽(Yesing)이란 자체 브랜드 생산에도 힘썼다.
고합그룹은 1990년 그룹 매출 7500억 원을 달성했고, 1991년에는 매출 1조 2000억 원을 기록하는 성과를 이뤘다. 그런데 장치혁 회장은 기초를 다진 후 엉뚱한 행보를 보였다. 1992년 장치혁 회장은 대북사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연해주 전용 공단과 땅 70년 임대 추진부터 연해주 나홋카 한국공단 투자 환경 조사,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공장 설립 협의, 고합그룹이 소련과 합작해 아무르에 2억 8000만 평 규모의 농축산물 경작사업 추진 등 여러 사업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1995년 9월 전경련 산하 남북경협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장치혁 회장이 임명되기도 했다.
장치혁 회장의 사업적 외도는 외환위기에 직면하며 고합그룹 전체를 위기에 빠뜨렸다. 재무상황이 극도로 악화된 고합그룹은 1998년 7월 15일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기업으로 결정되며 부채규모 재조정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부채 규모는 3조 5000억 원, 부채비율 434%였다. 이 가운데 부실 채무는 1조 2000억 원에 달했다. 고합은 2430억 원을 협조융자로 제공받고 13개 계열사를 (주)고합으로 합병하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3400억 원의 유가증권과 부동산을 매각하며 고합을 살리려 노력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2001년 11월 장치혁 회장은 고합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주)고합은 2004년 청산 후 소멸됐으며 고합물산 의류사업부는 신세계인터네셔널에 인수됐으며 대부분 청산, 폐업을 통해 사라졌다.
장치혁 전 회장은 경영에서 물러난 후 검찰 수사를 피할 수 없었다. 2005년 분식회계와 6794억 원의 불법대출 혐의, 회삿돈 7억 5000만 원을 유용하고 계열사 자금 30억 원을 선교재단에 출연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재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는 등 대부분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장치혁 전 회장은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주)고합에 33억 5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기도 했다. 장치혁 전 회장은 이후 고려학술문화재단의 대표권을 가진 이사로 등기되기도 했다.
한편 장치혁 전 회장의 부인 나옥주 씨와 장녀 장호정 씨는 (주)고합홀딩스의 대표이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장호정 씨는 강원도 원주시에 6만 6000㎡ 넘는 토지와 산림을 소유하며 대형 펜션을 운영하다가 2011년 자신이 대표로 있는 회사 케이하모니(현 고합홀딩스)에게 약 7억 원에 매각했다. 이후 펜션과 토지는 2013년 9월 아버지가 이사로 등기된 고려학술문화재단에 약 12억 5700만 원에 매각하기도 했다.
이후 이 토지들은 2016년 8월 한국콜마홀딩스에 매각됐다. 현재 장치혁 전 회장은 고려학술문화재단의 대표권제한규정이 삭제된 상태며 판교의 한 아파트에서 거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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