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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영원한 베프는 과연 존재할까 '파이어플라이 레인'

10대 단짝 털리와 케이트의 30년 인생 여정 그려…나이 넘나드는 교차편집으로 몰입도 배가

2021.02.26(Fri) 16:43:06

[비즈한국] 내겐 30년 가까이 된 친구가 몇 있다. 연애편지보다 절절하게 베를렌느의 시를 적어 교환일기를 건네고, 우정 아이템이라며 같은 반지를 나눠 끼고, 밤에 부모님 몰래 서로의 집을 오가며 꿈을 이야기하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비밀을 공유하던 친구 말이다. 청소년기에 친구는 엄마·아빠보다 나를 더 잘 알아주는 절대적인 존재다. 시시때때로 마음속에 폭풍이 휘몰아치는 과잉 감정의 시기였기에 ‘베스트 프렌드’란 존재는 더더욱 숭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우정은 변치 않을 것이며, 우리는 평생 곁에서 돈독하게 지낼 거라 믿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파이널플라이 레인’의 털리와 케이트처럼.

‘반딧불이길’​이란 이름의 파이어플라이 레인에 이사 온 털리(오른쪽)는 정반대 성향의 이웃집 소녀 케이트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마치 ‘​빨강머리 앤’​의 앤 셜리와 다이애나 배리처럼. 사진=넷플릭스 제공

  
1974년, 생부의 존재도 모른 채 히피 엄마에 이끌려 털리 하트(아역: 알리 스코비, 성인: 캐서린 헤이글)는 시애틀의 파이어플라이 레인(Firefly Lane), 우리말로 ‘반딧불이길’이란 동네에 이사를 온다. 예쁜 외모와 쿨한 태도로 어디서든 주목받지만, 집에서는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는 괴팍한 엄마 클라우드 때문에 괴로운 소녀다. 이웃집에 사는 케이트 멀라키(아역: 론 커티스, 성인: 세라 초크)는 털리와 정반대의 이미지. 부스스한 머리에 왕방울만한 안경을 낀 케이트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자신을 ‘케이티 곰’이라 부르며 사랑하는 화목한 부모님 밑에서 오빠와 함께 단란하게 살고 있는 건 털리가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털리와 케이트는 친구가 된다. 1974년의 파이어플라이 레인에서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던 열네 살 소녀들은 자라서 케이트는 PD가 되고 털리는 케이트의 프로그램의 앵커가 될 거라고 꿈꾼다. 물론 서로의 남자친구들도 친해질 거고 말이다. 1982년, 시애틀의 작은 방송사 KPOC에서 일하게 됐을 때는 그 꿈이 바로 코앞이라 여겼다. 케이트가 까칠하지만 매력적인 상사 조니 라이언(벤 로슨)을 짝사랑하고, 정작 조니는 순간순간 털리에게 매료된 듯 보이지만 아직 나쁠 건 없다고 여겼다.

같은 대학을 나와 시애틀의 작은 방송국에 취직한 털리(왼쪽)와 케이트. ‘파이어플라이 레인’​은 주인공들이 10대이던 70년대와 20대이던 1980년대를 오가기에 그 시절 헤어스타일과 패션 등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파이어플라이 레인’은 털리와 케이트가 처음 만난 1974년, 방송국에서 함께 일하던 1982년과 80년대, 그리고 43세가 된 2003년을 수시로 교차하는 다소 복잡한 구성을 취했다. 그러나 보다 보면 이 교차 방식이 무척 세련되고 영리하게 이어짐을 느낄 수 있다. 10대와 20대, 그리고 40대를 오가며 이들의 우정과 삶의 방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유추하면서 보게 되기 때문. 43세가 된 털리와 케이트의 삶은 소녀 때와는 조금 다르다. 털리는 ‘걸프렌드 아워’라는 유명 TV쇼의 진행자가 되어 오프라 윈프리와 엘렌 드제너리스와 비교되는 화려한 삶을 살지만, 펜트하우스 루프탑에서 언제라도 뛰어내릴 것처럼 공허함을 안고 있다. 조니와 결혼해 딸 마라를 얻었지만 오랜 시간 주부로 살며 경력 단절이 된 케이트는 2003년 현재, 종군기자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조니와 이혼을 진행 중이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40대 털리와 케이트의 삶은 그들의 캐릭터처럼 무척이나 다르다. 

2003년, 43세가 된 털리와 케이트. 털리는 유명 TV쇼 진행자가 되었지만 삶이 공허하고, 케이트는 남편과 이혼 과정을 겪으며 경력 단절의 무능한 자신이 실망스럽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살다 보면 느끼지만, 같은 학교와 같은 동네를 공유하던 어릴 때엔 쉬워도 40대에 이르기까지 우정을 지속하기란 무척 어려운 노릇이다. 특히 결혼과 출산이라는 큰 격동을 겪는 여자들의 경우, 새로운 가족에 들이는 시간도 턱없이 모자라기에 우정이 희미해지기 쉽다. 털리와 케이트만 해도, 털리가 20대 때 사귀었던 애인과 결혼해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주해 아이를 낳고 살았다면 이들의 우정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털리와 케이트의 우정이 위태로운 순간들은 곳곳에 있었다. 자신의 엄마가 부끄러웠던 열네 살 털리가 케이트에게 자신의 엄마가 암환자라고 한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 케이트와 조니와 털리의 연애 시그널이 맞지 않아 무척 애매한 사이가 되었을 때, 털리가 선을 넘고 테이트의 딸 마라의 편을 들었을 때 등 우정은 자의와 타의에 의해 순간순간 위협받는다. 그런 순간들을 이기고 이들은 30년의 세월을 함께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털리와 케이트의 30년 우정에서 변주 요인이 되곤 하는 케이트의 남편 조니와 딸 마라. 특히 여성에게 결혼과 출산은 우정이 달라지는 계기가 될 때가 많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우정의 지속에는 수많은 요소가 있고, 어느 것 하나 절대적이지 않다. 국가 간 외교만큼 지정학적 위치도 중요하고, 부딪치지 않을 만큼 적당한 범위 내의 경제와 서로에게 할애할 시간의 여유도 있어야 한다. 세상에 완벽한 평등이 없는 것처럼 관계도 결코 평등할 순 없다. 오래된 우정의 묘미는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어떻게 서로를 보완하는 방법을 찾는가에 있다. 털리와 케이트의 관계를 얼핏 보면 케이트가 전적으로 털리를 뒷받침하고 지지하며 참는 것처럼 보인다. 털리는 자신의 부와 명예를 이용해 손쉬운 방법으로 케이트의 우정을 얻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들은 서로를 잘 알기에 자신만의 방법으로 서로를 위한다. 80년대에 먼저 취직한 털리가 우격다짐으로 케이트를 방송국에 들여놓은 뒤, 케이트가 젖은 커피가루 만지는 걸 싫어하는 걸 알기에 항상 남몰래 커피 필터를 갈아 놓는 것처럼.

히피 엄마 밑에서 불안정하게 자란 털리는 어릴 적 경험으로 인해 진정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맥스(오른쪽)와의 관계도 지속될 것 같진 않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크리스틴 한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파이어플라이 레인’은 10회로 구성된 시즌1을 2월 3일 공개한 이래 전 세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2월 26일 기준 넷플릭스 드라마 5위). 10대부터 40대에 이르기까지 두 여자의 우정과 사랑, 삶의 방식을 잔잔하되 느슨하지 않은 짜임으로 보여주니 극적 긴장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여러 면에서 곱씹을 게 많다. 심지어 1시즌의 마지막, 45세가 된 2005년의 털리와 케이트가 더는 얼굴을 보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우정이 무슨 일을 맞았는지, 그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빨강머리 앤’의 앤 셜리와 다이애나 배리처럼 엄숙하게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던 친구들은 이제 나와 함께 40대가 되었다. 개중엔 더는 연락하지 않는 친구도, 서로에게 적당히 신경 쓰는 멀어진 친구도, 만나면 즐겁지만, 공통 화제를 생각해내려 애를 써야 하는 친구도 있다. 30년 세월이어도 가끔은 말 한 마디, 눈빛 한 번에 빈정이 상할 때도 있다. 우정은 계속되어도 그 우정의 순도나 결이 변하지 않고 영원할 순 없다. 40대에도 중학생처럼 서로만 존재하듯 격한 우정을 나눌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판타지가 많이 깃들어 있긴 하지만 ‘파이어플라이 레인’은 우정을 어떻게 갈고 닦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30대 이상 여성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청소년 관람불가).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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