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넷플릭스 개봉 예정작을 보면서 알림을 누를 때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일정 기간만 극장에 걸리는 개봉 영화도 아니고 OTT에 들어가서 언제든 볼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알림을 누르며 공개를 기다렸던 작품이 있다. 국내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기다리고 공개 후에도 떠들썩하게 이야기 중인 영화 ‘승리호’냐고? 아니다. 나의 선택은 캐리 멀리건과 랄프 파인즈가 주연을 맡은 ‘더 디그’다.
영화는 1939년 영국 서포크 서튼 후 지방에서 앵글로색슨 유적을 발굴하는 실화를 바탕으로 쓴 존 프레스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남편을 보내고 홀로 아들을 키우는 ‘이디스 프리티’라는 부인이 자신의 땅에 중요한 유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발굴가 ‘배질 브라운’을 고용해 일어나는 일이다. 문자 그대로 땅을 파서(dig) 유적을 발굴한, 솔직 담백한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영화가 왜 끌렸을까?
먼저 고고학에 대한 아련한 감성 때문이다. 우주여행과 역사탐방여행을 두고 고르라면 개인적 취향은 역사탐방여행이다. 어릴 적 해적판 만화 ‘나일강의 소녀’(정식 제목은 ‘왕가의 문장’, 아직도 완결 안 났음)에 흠뻑 빠지고 하워트 카터의 투탕카멘 발굴기를 읽고 자라다 보면 고고학을 굉장히 낭만적인 학문으로 여기게 된다. 둘째는 역시 캐리 멀리건과 랄프 파인즈라는 배우에 대한 믿음이다. 물론 몰라보게 나이 든 모습으로 등장한 랄프 파인즈는, 아직도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그를 기억하는 나에겐 가슴 아팠지만. 심지어 모르고 봤는데, 릴리 제임스도 출연한다. 마지막 이유는 예고편에서부터 입이 헤 벌어지던 빼어난 풍광을 담은 영상미. 물론 세 가지 이유 중 하나만 있어도 ‘더 디그’를 봤을 것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히 만족스럽다.
‘더 디그’는 2차 세계대전을 코앞에 둔 1939년이 배경이다. 어릴 적부터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이디스(캐리 멀리건)는 여러 둔덕들이 있어 뭔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땅을 남편과 함께 사들였다. 그러나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임박한 전쟁으로 모든 발굴 작업이 분주한 탓에 제대로 고고학을 교육받지 않아 이단아라 불리는 아마추어 발굴가 배질 브라운(랄프 파인즈)을 소개받는다.
이디스 부인과 브라운의 발굴 작업은 그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는다. 한때 헨리 8세도 이 둔덕들을 파헤치려 했으나 뭔가 나온 적이 없었고, 서포크 지역의 입스위치 박물관 또한 이들의 발굴에 코웃음 칠 뿐이다. 아마 돈 많은 과부의 심심풀이 취미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줄곧 이곳에 뭔가 있으리라 생각한 이디스와, 바이킹을 넘어 앵글로 색슨의 유적이 있지 않을까 짐작했던 브라운의 생각이 맞았다. 강에서 한참 떨어진 이 둔덕에서 위대한 위인의 무덤일 거라 짐작되는 배의 형태가 나타난 것.
‘더 디그’는 상업영화의 다이내믹한 서사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들 법한 영화다. 영화는 기록이나 유물이 거의 없어 ‘암흑시대’라 불리던 6세기 앵글로 색슨의 유물을 발굴하는 역사적 순간을 보여주지만, 결코 흥분하거나 드라마틱하게 그려내지 않는다. 전쟁에 맞서 유물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라든가 유물의 소유권을 두고 각자 치열하게 암투를 벌인다거나 혹은 병에 걸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디스와 브라운이 사랑에 빠진다거나 하는 그런 MSG 가득한 내용은 ‘더 디그’에 일절 없다. 오히려 그렇게 조명할 만한 부분도 한사코 보여주지 않는 인상이 강하다.
대신 땅을 파고 과거를 찾는 사람들의 면면을 그곳의 풍경처럼 지극히 담담히 담아내며 과거와 현재, 미래, 그리고 삶과 죽음을 조용히 반추할 수 있게 만든다. 죽음을 앞둔 이디스가 죽은 자들의 묘를 파헤치는 일의 수장이 된 것이며,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 전쟁을 앞두고도 묵묵히 땅을 파는 사람들의 모습은 일견 아이러니한데,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가 생각날 정도다.
유명 고고학자들에 밀려 자신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을 거라며 발굴에 빠지겠다는 브라운에게 그의 아내가 던진 말은 어떤가. “발굴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했잖아. 후대에 그들의 뿌리를 알려주는 일이니까.” 속물적 근거로 자신을 무시하던 유명 고고학자에게 상처받은 브라운의 마음을 돌리는 말이, 평소 그의 일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던 속물적인 아내의 말이라는 건 울림이 크다. 남편의 신념을 잘 알기에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그 어렵다는 진정성이 그렇게 툭 불거진다. 유물의 소유권을 인정받은 직후, 어린 아들을 두고 죽을 운명인 자신의 상황 때문에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느낀 이디스가 브라운과 나누는 대화도 곱씹을 만하다.
“우리는 죽어요. 결국에는 죽고 부패하죠. 계속 살아갈 수 없어요.”
“제 생각은 다른데요. 인간이 최초의 손자국을 동굴 벽에 남긴 순간부터 우린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언가의 일부가 됐어요. 그러니 정말로 죽는 게 아니죠.”
이 외에도 ‘더 디그’에는 조용한 신념과 믿음을 가지고 서로를 지지하는 이디스와 브라운의 우정, 발굴에 참여했다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게 되는 여성 고고학자 페기(릴리 제임스)와 발굴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곧 전쟁에 임하게 되는 로리(조니 플린), 엄마 이디스가 곧 죽을 것이란 것을 알지만 무엇도 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 소년 로버트 등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소란스럽지 않게 스치듯 담긴다. 공기처럼 언제나 옆에 존재하지만, 매일매일 사시사철 달라지는 풍경처럼, 영화 속 인물들도 조용하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결국 모두 죽겠지만 브라운의 말처럼 무언가의 일부가 되고, 누군가에게 기억될 것이다. 대영박물관 서튼 후 유물실에 기록된 이디스와 브라운처럼.
‘더 디그’는 잔잔하지만 강렬하고, 아름답지만 서글프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들게 하는 영화다. 영국 정부가 전쟁을 앞둔 시민들의 사기를 돋우려 제작한 포스터의 문구 ‘Keep Calm and Carry On(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의 느낌을 무척 잘 구현한 작품이기도 하다. 우주를 유영하는 ‘승리호’도 좋지만, 우리의 삶은 오히려 ‘더 디그’에 가깝지 않나 싶다. 매일이 삽질의 연속이더라도 괜찮다는 걸, ‘더 디그’를 통해 느껴 보길.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처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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