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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기네스북에 이름 올렸던 나산그룹

의류업과 부동산으로 큰 돈 만졌지만…유통업 진출하며 막대한 차입금에 IMF 맞으며 몰락

2021.02.12(Fri) 15:39:54

[비즈한국] 1990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사람은 삼성, 현대 등 흔히 알려진 대기업 오너가 아닌 안병균 나산그룹 회장이었다. 1년 동안 47억 400만 원을 벌어, 23억 1700만 원을 납세했다. 설립된 지 10년 밖에 안 된 기업 오너의 소득과 함께 나산그룹은 재계의 관심을 받게 됐고, 재계 57위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하지만 안병균 회장의 잘못된 선택으로 나산그룹은 1998년 1월 최종 부도를 내며 짧은 역사를 뒤로한 채 사라졌다.

 

#2700원 들고 서울로 상경한 18세 소년

 

1948년생인 안병균 씨는 전라남도 함평군 출신으로 가난을 벗어나고자 18살의 나이에 단돈 2700원을 들고 서울로 상경했다. 안병균 씨는 공사장 잡부, 영화 엑스트라 일을 전전하며 모은 자금으로 요식업에 뛰어든다. 중국집을 오픈해 번 돈으로 명동 인근에 일식집을 내기도 한다.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의 1992년 모습. 사진=비즈한국 DB


순조롭게 요식업을 이어가는 듯 했으나 1974년 화재로 종업원 2명이 사망하고 안병균 씨도 중상을 입었다. 화재로 막대한 손해도 입었다. 안병균 씨는 재기를 모색했다. 1970년 중반 공연을 보며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을 즐기는 문화가 번창하던 시기에 안병균 씨는 요식업을 통해 얻은 경험을 토대로 ‘극장식당’에 눈을 돌린다. 안병균 씨는 극장식당으로 유명하던 ‘무랑루즈’. ‘초원의집’을 인수했다.

 

안병균 씨는 다른 극장식당과 차별화를 주기 위해 최고 인기 개그맨 고 이주일 씨를 섭외하기도 했다. 고 이주일 씨의 인기가 더해져 무랑루즈와 초원의집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안병균 씨는 재개발사업이 들어가기 전인 1986년까지 약 10년 간 극장식당을 운영했고, 퇴계로에 추가로 극장식당을 인수하며 막대한 돈을 벌었다. 

 

안병균 씨는 1980년에 들어서며 의류 사업에도 관심을 보였다. (주)문화데스크를 설립해 메이커 의류 재고품을 싸게 구입해 파는 일을 시작한다. 1000만 원을 광고비로 사용했지만 효과가 없자 광고비를 10배로 늘려 홍보에 집중하자 수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한 의류사업에서 6개월 만에 5억 원가량을 잃게 된다. 1982년 문화데스크의 사명을 (주)나산실업으로 변경했고, 여성복에 초점을 맞추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한다. 1983년 출시한 ‘조이너스’는 1994년 단일 브랜드로 매출 1000억 원을 달성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으며 1989년 ‘꼼빠니아’를 출시해 1996년 12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기도 한다.

 

이후 남성복에도 진출해 ‘트루젠’ 등 여러 브랜드를 출시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안병균 회장이 1990년 신고한 소득 47억 400만 원 중 41억 원가량은 의류사업을 통해 얻은 게 아니었다. 선릉역 주변 땅에 오피스텔 ‘샹젤리제 빌딩’을 짓고 분양해 막대한 수입을 챙겼고, 1988년 나산관광개발을 설립한 후 경기도 포천에 골프장을 개장해 회원권을 분양했다. 또한 나산CLC(헬스클럽 운영)를 설립하고 스포츠센터 회원권을 분양해 41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3조 원 매출 꿈꾼 나산그룹, 유통업에 묶이다

 

나산그룹은 나산산업, 나산인터내셔널, 나산종합건설 등을 잇달아 설립했고,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하지만 나산그룹의 사업다각화는 의류사업과 부동산 분야에만 한정돼 있었다. 안병균 회장은 1995년 5000억 원을 투자해 1997년까지 의류업, 종합건설업, 종합컨설팅업, 유통업, 관광레저업으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토대로 3조 원의 매출을 올리려 했다. 

 

이 계획은 1994년 영동백화점을 150억 원에 인수하며 시작됐다. 1995년부터 경기도 광명시, 수서, 천호, 강남 등에 4개의 백화점을 세우며 유통업에 나섰다. 안병균 회장은 유통업이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으며 2000년까지 10조 5000억 원을 투자해 그룹 매출의 35.5%를 점유할 계획이었다.

 

1994년 나산그룹은 9개의 계열사와 함께 3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중견그룹으로 도약했고, 1997년 13개의 계열사와 1조 3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재계 57위의 그룹으로 이름을 올렸다. 

 

1998년 10월 지하철 7호선 공사장에 접한 지하 2층 기둥 5개에서 발견된 균열로 건물붕괴 위험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서울 논현동 나산홈플레이스백화점. 2008년 철거 도중 붕괴돼 작업 인부들이 매몰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유통업 진출을 위한 대부분의 자금은 차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면서도 건설업체인 송산, 광주방송의 대주주인 대주건설, 한길종합금융 등을 인수하며 계열사 확장을 이어나갔다. 그룹을 확장하는 동시에 그룹 홍보를 담당하던 계열사와 경영관리실 인원을 대규모로 축소하기도 했다. 이걸로도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어려웠고, 백화점에 투입된 650명의 직원에 대해서도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간다. 

 

조이너스와 꼼빠니아도 변화하는 소비자의 욕구에 적응하지 못해 제살 깎아먹는 할인판매를 이어왔다.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IMF 구제금융 직후인 1998년 1월 14일 안병균 회장은 최종부도를 내고 계열사 매각에 나섰다. 당시 안병균 회장은 “직원들과 협력업체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살고 있는 집과 1500억 원에 달하는 부동산, 주식, 채권 등 모든 재산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자택, 상가 등 몰수에도 가족들은 사업 영위

 

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정반대였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나산종합건설을 통해 안병균 회장은 756억 원을 단기대여금 형식으로 지급받아 개인적으로 사용했고, 538억 원에 달하는 공사대금을 지급하지 않는 등 부당지원 한 일이 밝혀졌으며 나산종합건설을 통해 부실 계열사인 나산유통, 나산클레프 등에 2000억 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재산가치가 없는 안병균 회장의 부동산을 나산종합건설에 675억 원에 매각하기도 했다.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이 살았던 삼청동 집의 2007년 모습. 사진=우태윤 기자


66억 원 횡령에, 공적 자금 290억 원 가량을 인출해 부동산 자금으로 사용했으며 금융기관에 담보로 제공된 200억 원 상당의 골프장 회원권을 자신의 부인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에 무상양도 했다. 이들 혐의 중 일부만 인정돼 안병균 전 회장은 2004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나산그룹과 관련된 모든 지분이 소각되고, 성북동 자택 등 부동산이 경매로 넘어가며 ​안병균 전 회장은 ​공식 활동을 멈췄다. 하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다. 아내인 박순희 씨는 (주)부림비엠의 최대주주이자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고, 아들 안필호 씨와 안유선 씨가 사내이사로 있다. 안필호 씨는 (주)가우플랜의 대표이사로 서초구 잠원동의 더리버사이트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의 감사는 안병균 전 회장이다. ​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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