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업들은 때론 돈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을 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법이나 제도를 알면 더욱 자세한 내막을 이해할 수 있다. 새로 시작하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비즈니스 법률’은 비즈니스 흐름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를 소개한다.
공정거래법은 담합 가담자가 공정거래위원회에 담합 사실을 신고하거나 공정위의 담합 조사에 협조하면 제재조치를 감면하는 ‘리니언시(leniency) 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1순위인 자진신고자 또는 조사협조자에 대해서는 시정명령·과징금 납부 명령·검찰 고발 전부를 면제하고, 2순위에 대해서는 과징금의 50%를 감경하고 검찰 고발을 면제한다.
리니언시는 게임이론의 하나인 죄수의 딜레마를 응용한 제도이다. 리니언시 제도하에서 담합 사실을 자인한 가담자에게 감면 혜택이 부여된다. 이러한 조건이라면 담합 가담자로서는 담합 사실을 부인할 이유가 없다. 담합을 계속 부인하면 제재가 가중되는 불이익을 받지만, 자인하면 감면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공범자도 마찬가지기에 공범자에 대해서 담합 부인을 기대하기 어렵다. 서로 앞다투어 공정위에 담합 사실을 신고하는 이유다.
자진신고 사건에서는 담합 가담자가 자진신고자 지위를 취득하기 위해 담합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표를 제출한다. 심지어 공정위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담합을 추가로 자인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입찰 한두 건을 대상으로 하는 경미한 담합 사건이 수십, 수백 건의 입찰 담합 사건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실제로 공정위 보도자료를 보면 담합 대상 입찰이 수십, 수백 개에 달하거나 수년에 걸쳐 담합이 계속된 사례가 많다. 현실적으로 공정위가 건건이 물증을 확보하여 담합을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위와 같은 사건은 대부분 자진신고가 있었고 자진 신고자가 제출한 담합 목록에 기초하여 제재 처분까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담합 가담자 일방이 자진신고를 해버리면 다른 가담자가 담합을 부인하는 것이 곤란해진다. 뇌물 사건에서 돈을 줬다(증뢰)는 사람이 나타날 경우 돈을 안 받았다(수뢰)고 주장하는 것이 곤란한 경우와 같다.
다만 간혹 자진신고 사업자가 있음에도 법원이 담합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있어 화제가 되기도 한다. 주유소 원적지를 서로 침탈하지 않기로 하는 정유사들의 담합이 문제가 된 사안에서 서울고법 2011누45889 판결은 자진 신고자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담합을 부인했다(대법원 확정). 라면 담합 사건에서는 자진 신고자의 핵심 임원이 사망하는 바람에 재판 과정에서 자진 신고자의 진술에 대한 신빙성을 확인할 길이 없게 되자 담합을 부인하는 판결이 선고됐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담합을 인정하는 리니언시 사업자의 진술에 따라 제재 처분이 내려지고 그 처분이 확정된다.
이처럼 리니언시 제도는 담합을 적발하고 제재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2000년대 이후 담합에 대한 제재사례가 폭증했는데, 그 배경에는 조사역량의 강화도 있겠지만 리니언시 제도의 활성화를 위해 2005년 공정거래법이 개정된 것도 큰 원인이다.
리니언시 제도를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담합 주도 사업자임에도 자진신고를 이유로 제재를 면제하는 것은 부당하다거나, 공정위 조사가 개시된 이후 담합 사실을 인정한 조사협조자에 대해서는 감면의 범위를 축소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있다.
자진신고를 하기 위해서는 과거 수년간의 영업활동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세한 기업은 퇴사자가 많고 조직에 체계가 없다 보니 담합 사실을 정리할 능력이 없다. 이 때문에 대기업이 자진신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대기업은 시장을 주도하는 지위에 있고 그러한 배경에서 담합도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리니언시의 혜택이 담합을 주도한 대기업에 집중돼 부당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아울러 담합 가담자가 처음에는 담합을 부인하면서 공정위 조사 내용을 지켜보다가, 공정위가 증거를 확보하면 그때 가서 담합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가담자에 대해서는 감면 혜택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지적이 리니언시 축소·폐지의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10년 넘게 리니언시 제도가 운영되면서 이러한 폐단이 시정됐거나 그러한 폐단을 고려하더라도 리니언시 제도의 실보다 득이 크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중소기업들도 리니언시 제도의 내용을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대기업들이 옵서버로 끼워준 중소기업이 자진신고를 함으로써 대기업의 뒤통수를 치는 사례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또 회사의 의사결정은 하급자의 보고와 경영진의 결재를 통해 이루어지고, 경영진의 결재를 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구체적인 상황(예를 들어 회사에 불리한 증거의 발견 등)이 필요하므로, 회사가 공정위 조사를 지켜보다가 자진신고를 하는 경우에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한편 최근에는 공정위가 담합 가담자의 조사 협조 이전에 이미 담합 자료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감면 혜택을 부정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고 있고, 대법원 2017두54746 판결은 공정위의 이러한 판단은 적법하다고 판시했다.
위와 같은 공정위의 입장은 기회주의적 가담자를 응징한다는 면에서 납득이 가는 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자료 확보라는 우연한 사정을 이유로 감면의 범위를 축소한다면, 담합 가담자는 자진신고(조사 협조)를 하려는 동기를 잃게 된다.
자진신고 사업자는 업계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배척당하고 거래처로부터 손해배상과 부정당업자 제재 등을 당한다. 공정위 출석·진술과 자료 확인 등 조사 협조에 들이는 노력도 만만치 않다.
이 모든 노력과 수고는 오로지 감면의 혜택을 받겠다는 일념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건이 다 끝나가는 상황에서 공정위가 갑자기 자료 확보를 이유로 감면의 혜택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회사 차원에서 엄청난 불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자진신고를 결정한 임원은 그 자리를 보전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니언시 혜택이 불확실하다면 사업자가 자진신고를 하는 사건은 감소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담합 적발은 어려워질 것이다.
리니언시 제도는 담합 적발에 크게 기여했다. 검찰은 수사지침을 개정해 리니언시 사업자에 대해서 불기소의 혜택을 부여하기로 했고 주가조작 등의 범죄에 대해서 리니언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개진되고 있다.
따라서 담합 가담자를 감면하는 것은 찜찜하다는 감상론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담합 근절에 대한 기여를 고려해야 한다. 리니언시의 범위를 축소하는 것은 신중히 검토해야 할 문제다.
정양훈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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