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그레이트 리셋(Great Reset)’.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5일 신년사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비해 금융권이 모든 것을 재설정한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며 이 단어를 언급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유동성 위기와 기존 사업의 부침 등은 비단 금융권뿐 아니라 대부분 기업이 부닥친 문제다. 기회를 위기로 바꾸자는 인식 아래 올해 건강기능식품·의약품·화장품·친환경 소재 등 분야를 막론하고 바이오 산업에 진출하거나 확장을 예고한 기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 SK바이오랜드 인수로 고기능성 화장품·원료 사업 모색
대표적인 곳이 유통 전문기업인 현대백화점그룹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은 4일 ‘디지털 비전 선포식’에서 다가올 10년간의 사업 방향성을 담은 ‘비전 2030’을 발표했다. 유통, 패션, 리빙·인테리어 등 3대 사업 이외의 신사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해 2030년에는 매출 40조 원을 돌파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현대백화점이 제시한 새로 육성할 사업에는 뷰티·헬스케어·바이오·친환경·고령 친화 등의 분야가 포함됐다.
바이오 기술이 활용될 부분은 크게 뷰티와 바이오 사업 두 부문이다. 우선 현대백화점그룹은 계열사인 패션 전문기업 한섬을 통해 올해 프리미엄 고기능성 기초 화장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여기에 바이오가 주요한 역할을 한다. 2020년 5월 한섬은 서울 청담동 클린피부과와 신약 개발 전문기업 프로젠이 공동 설립한 회사인 클린젠코스메슈티칼 지분 51%를 인수한 바 있다. 클린젠코스메슈티칼이 보유한 약학 물질 등 바이오 기술을 활용해 코스메슈티컬(Cosmeceutical·의약 성분을 더한 기능성 화장품) 분야로의 진출을 알렸다.
현대백화점그룹은 바이오 원료와 바이오 의약품을 개발 및 제조할 방침이라고도 밝혔다. 이는 2020년 8월 현대백화점그룹 자회사 현대HCN의 존속법인 현대퓨처넷이 SK로부터 SK바이오랜드 지분 27.9%를 약 1205억 원에 인수한 행보와 무관치 않다. 현대바이오랜드는 화장품 및 건강식품 원료·건강 기능성 식품 원료·원료의약품 등이 주요 분야인 회사로, 2017년 이후 줄곧 1000억 원이 넘는 연간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다. 현대바이오랜드는 바이오 소재 지혈제, 피부 줄기세포를 이용한 바이오 제품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할 예정이라고 사업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한섬이 화장품과 의약품을 결합한 제품을 기획하고, 현대바이오랜드가 의약품 원료 제조 및 생산 능력을 발휘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 신사업 중심에는 바이오 기술이 견고히 자리 잡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코로나19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업을 재편해야 하는 입장이다. 지난 3분기 현대백화점은 전년 동기 대비 24.5% 증가한 6623억 원의 매출액을 기록했지만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447억 원과 375억 원으로 각각 26.5%와 28% 줄었다. 코로나19로 인한 백화점 매출 부진이 영향을 끼쳤다.
#CJ제일제당, 화이트바이오 사업 본격화…오리온은 중국에 관심
식품업계에서도 올해 바이오 사업으로의 진출 및 확장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가정간편식 성장으로 코로나19 수혜기업으로 꼽히는 CJ제일제당은 올해 ‘화이트 바이오’ 사업을 본격화한다. 바이오산업은 레드(의약)·그린(농업)·화이트(화학) 분야로 나뉘는데, 화이트 바이오는 생물자원을 이용해 화학제품을 대체하는 친환경 제품을 생산하는 바이오 기술 분야를 말한다. CJ제일제당은 올해 인도네시아 파수루안의 바이오 공장에 PHA를 만들 수 있는 전용 생산 설비를 신설할 예정이다. PHA는 100% 해양 생분해 친환경 플라스틱 소재로, CJ제일제당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소수 기업만 상용화에 성공했다.
식품첨가제와 사료첨가제에 중심이던 바이오 사업을 글로벌 친환경 소재 분야까지 확장하겠다는 게 CJ제일제당의 구상이다. CJ제일제당은 식품·바이오·물류 사업이 핵심 사업으로 바이오 분야도 연간 2조 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기존 바이오 사업과 발효기술이라는 측면에서 시너지를 노려볼 수 있고, 친환경 소재 수요가 앞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화이트바이오 사업에 진출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리온은 중국 바이오 시장을 넘본다. 오리온홀딩스는 2020년 10월 중국 국영 제약기업 ‘산둥루캉의약’과 바이오 사업 진출을 위한 합자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오리온홀딩스와 산둥루캉의약이 각각 65%, 35%의 지분을 투자해 합작법인을 세우는 방식이다. 2017년 오리온이 간편식·음료·바이오 사업을 3대 신사업으로 선정한 지 3년 만이다. 국내 바이오 진단 기업 ‘수젠텍’과 ‘지노믹트리’와 업무협약을 체결한 오리온홀딩스는 결핵진단키트와 대장암진단키트 중국 판매에 나설 예정이다. 오리온홀딩스는 추후 합성의약품과 신약 개발 사업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오리온 관계자는 “중국 시장이 워낙 크고 갈수록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져 그룹의 성장 동력원으로써 바이오 사업에 진출하게 됐다. 국내에 바이오 기술을 갖고 있으면서 해외 진출을 원하는 바이오 기업이 상당히 많다. 초기에는 이들 기업 기술을 이전해와 생산·판매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이후 자체적인 역량이 쌓이면 신약 개발 등에도 나서려 한다. 아직 합작법인 설립은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바이오 기술을 미래 먹거리로 보고 관심을 두는 기업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정연승 한국유통학회 차기회장(단국대 경영학부 교수)은 “코로나19 이후 헬스케어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특히 식품·유통 분야는 바이오 기술에 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가정간편식이나 밀키트 같은 새로운 제품 개발에도 바이오 기업과의 협업이 도움이 될 듯하다”고 했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바이오 의약품 시장보다는 훨씬 저렴하고 시간도 단축되는 화장품이나 건강기능식품 시장에 뛰어드는 기업이 많고 앞으로도 더 생겨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식품·유통업계 대기업이 진출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섣불리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볼 가능성도 충분하다. 대기업이 바이오 사업에 진출했다 이미 실패한 사례도 있다. 한화그룹이 대표적이다. 석유화학업체인 한화케미칼은 신약 개발을 위해 2010년 바이오의약품 생산을 위한 공장을 설립했다가 2016년 공장을 매각하며 바이오사업에서 손을 뗐다. 당시 개발한 바이오시밀러 의약품 판매가 부진했고, 한화케미칼은 “석유화학과 태양광 사업을 강화한다”며 바이오 사업을 철수했다.
바이오 벤처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유정희 벤처기업협회 혁신벤처정책연구소 부소장은 “식품·유통 등 이종 및 대기업 등의 자본이 바이오에 투자된다면 관련 산업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인수합병(M&A)이 촉진돼 관련 벤처기업들이 스케일업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며 “바이오산업 내 다양한 플레이어들의 상호 공존과 경쟁을 통해 건전한 생태계 발전이 가능하리라 예상된다”고 밝혔다.
다만 앞서의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대부분 기업이 바이오산업 중에서도 비용이 적게 들고 시간도 단축되는 건강기능식품과 화장품 분야에 관심이 많다. 대기업 진출이 늘어나면 건강기능식품과 화장품 분야에 주로 진출해 있는 바이오 벤처 입지가 약해질 수 있다. 이미 과포화 상태”라고 우려를 표했다.
김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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