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클래식 마니아는 아니지만 연말이 되면 베토벤의 ‘합창’이 그리워진다. 처음 친구와 극장에서 봤던 영화 ‘불멸의 연인’을 시작으로 선배가 보여준 서울시향의 공연까지, 언제든 연말의 겨울에 베토벤의 ‘합창’만큼 어울리는 선택은 찾기 힘드니까. 여전히 코로나19가 극성인 지금은, 공연장에서 ‘합창’을 보던 옛날이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심지어 올해 서울시향은 연주자를 평소 절반으로 줄이고 무관중 온라인 중계로 ‘합창’을 선보였다). 그렇다면 제목부터 베토벤을 언급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를 다시 보는 건 어떤가. 약식이지만 ‘합창’을 들을 수 있고, 또 약식이지만 빈 신년음악회의 앙코르 곡으로 유명한 라데츠키 행진곡도 들을 수 있다. 무엇보다 방구석 1열에서.
‘베토벤 바이러스’는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석란시(가상의 도시) 9급 공무원으로 근무 중인 두루미(이지아)의 시의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프로젝트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석란시를 음악의 도시로 만들자는 것. 이 아이디어는 강춘배 시장(이한위)의 마음에 들었으나 두루미가 섭외한 공연기획자가 시의 지원금 3억 원을 횡령하는 바람에 무산될 위기에 놓인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는데, 드라마는 이때부터 ‘열과 성을 다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정신일도 하사불성’의 자세에 입각해 K드라마스러워진다. 두루미가 이 사실을 숨긴 채 자격에 미치지 못하는 아마추어급이거나 문제가 있는 이들을 마구잡이로 끌어 모은 거다.
악보도 볼 줄 모르는 교통경찰 강건우(장근석), 음대 졸업 후 전업주부로만 살아온 건우의 이모 정희연(송옥숙), 서울시향 출신으로 30년 넘게 오보에를 연주했으나 현재 치매 진행 중인 김갑용(이순재), 예고를 자퇴한 천방지축 플루티스트 하이든(현쥬니), 캬바레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는 클래식 일자무식 배용기(박철민) 등이 두루미가 모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면면이다. 실력은 못 미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는 두루미나 두루미의 음대 선배이자 회사 다니는 와중 틈틈이 연주를 했던 박혁권(정석용) 정도는 이들에 비하면 대학교수급일 정도. 가장 큰 문제는 이미 섭외한 석란시향의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킬러’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최고 수준급 실력 외에는 취급하지 않는 ‘마에스트로 강’ 강건우(김명민, 교통경찰 강건우와 동명이인)라는 사실이다. 한 오케스트라에서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만나면서 우여곡절, 좌충우돌, 요절복통 끝에 뭔가를 이뤄낸다는 스토리가 심히 K드라마답지 않은가.
드라마를 보던 2008년에도 그랬지만 다시 본 지금도 드라마 속 인물들, 특히 두루미와 교통경찰 출신 작은 강건우의 선의를 내세워 벌이는 각종 민폐와 오지랖과 고집은 보는 내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다. 세계 최정상급 지휘자에게 오합지졸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데리고 연주를 하라니, 이미 그 출발부터 글러먹었다고. 그럼에도 이를 계속 지켜보게 만드는 건 예술 소재 작품에서 언제나 잘 먹히는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알고 보니 절대적 재능을 가진 천재’라는 클리셰와 ‘연기가 곧 개연성’임을 보여주는 ‘강마에’ 김명민의 신들린 연기 덕분이었다. 드라마 초반 보이는 ‘강마에’와 동창인 천재 지휘자 정명환(깅영민)의 관계는 대중문화에서 무척 좋아하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구도이고, 음대는 고사하고 악보도 읽을 줄 모르고 독학으로 트럼펫을 공부했던 작은 강건우가 단 몇 개월 만에 자신만의 지휘 스타일을 찾아내는 절대음감의 천재로 설정된 것 또한 ‘슬램덩크’ 강백호 뺨치는 작위적이지만 무척 재미진 설정이 아닐 수 없거든(그래서 복장도 많이 터지지만).
그리고 김명민. ‘불멸의 이순신’ ‘하얀거탑’에 이어 또 다시 리더형 인물로 나선 그는 한국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캐릭터 ‘강마에’를 신들린 듯 표현했다. “아줌마 같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뭐라 그러는 줄 알아요? 구제불능, 민폐, 걸림돌, 많은 이름들이 있는데 난 그중에서도 이렇게 불러주고 싶어요. 똥. 덩. 어. 리!” 과장되게 입술을 이기죽거리며 실력 없는 첼리스트 정희연에게 일갈하는 이 대사는 상대 배우인 송옥숙이 실제로 모욕감을 느낄 정도였고, ‘똥덩어리’는 그해 명대사로 등극했다.
‘강마에’는 고압적이고 위압적이고 독선적인 지휘자지만 다시 또 잘 살펴보면 실력 외에 다른 건 보지 않는 공평무사한 실력우선주의에, 남에게 상처받기 싫어 위악을 떠는 고독한 영혼에, 한 번 마음을 쓰인 뒤부터는 은근히 뒤로 챙기는 ‘츤데레’인 면모가 강한 인물이다. 무례하고 다분히 ‘라떼는 말이야’인 부분도 있지만, 그가 날리는 말들은 대부분 ‘뼈 때리는 팩폭’이긴 하다. 각자의 사정을 늘어놓는 단원들에게 날린 “핑계입니다. 핑계입니다. 여러분은 마음만 먹으면 100가지도 댈 수 있는 핑계를 가지고 도망간 겁니다”라는 말은 지난 1년을 허송세월 스마트폰과 함께 보낸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니까.
방영 전만 해도 박신양, 문근영 주연의 ‘바람의 화원’과 송일국 주연의 ‘바람의 나라’와 맞붙게 되어 기대를 얻지 못했던 ‘베토벤 바이러스’는 예상을 깨고 수목 드라마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2008년 하반기를 ‘강마에 신드롬’으로 들끓게 만들었다. 앞서 말했듯 김명민의 ‘하드캐리’가 큰 몫을 차지하지만 음악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클래식은 분명 진입장벽이 높은 장르지만, 베토벤의 ‘운명’ ‘황제’ ‘합창’을 비롯해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 포레의 ‘파반느’,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 등 많이 들어본 음악과 엔니오 모리코네의 ‘가브리엘스 오보에’와 인순이의 ‘거위의 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들이 스산한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10화에서 공연하는 베토벤의 ‘합창’은 그중 절정.
코로나가 극심했던 지난 봄 이탈리아에서 집집마다 발코니 연주회가 열렸던 것처럼, 음악은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진 못하지만 작고도 단단한 위로가 되어주곤 한다. 한파가 시작되는 연말연초, 새해를 맞는 이 시기에 ‘강마에’가 지휘하는 음악들을 들으며 모두들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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