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봄, 여름, 가을마다 생각나는 드라마가 있듯 겨울이면 생각나는 드라마들이 있다. 사람마다 각자 떠올리는 작품은 다르겠지만 겨울 드라마에서 ‘겨울연가’만큼 독보적인 드라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제목부터 겨울을 배경으로 한 절절한 사랑 이야기라고 선언하는 이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 역사에 ‘한류’라는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일본의 중장년 여성층에 ‘겨울연가’는 광풍처럼 몰아쳤었다. 남주인공을 맡은 배용준은 일본에서 왕족에게나 붙이는 극존칭 ‘사마’를 붙여 ‘욘사마’로 추앙받았고, 여주인공인 최지우는 ‘지우히메(공주)’가 되었을 정도.
‘겨울연가’는 익숙한 클리셰들이 총출동하는 드라마다. 친아버지를 찾기 위해 춘천으로 전학 온 고등학생 강준상(배용준)은 전학 첫날부터 버스에서 정유진(최지우)과 대면하며 서로를 눈여겨보게 된다. 자신의 친아버지로 짐작되는 김진우 교수(정동환)의 아들 김상혁(故 박용하)과 상혁이 좋아하는 정유진, 유진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끼는 오채린(박솔미) 등과 같은 반이 된 준상은 이내 유진과 좋아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자신이 찾던 친아버지가 상혁의 아버지가 아니라 유진의 아버지일 것이라 의심되는 사진을 우연히 보고 충격을 받아 미국으로 떠나려다 교통사고가 난다! 학교에 준상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고 드라마는 10년 후로 훌쩍 이동. 건축가가 된 유진은 상혁과 약혼을 앞두고 있는데, 그의 앞에 채린이 준상과 똑 닮은 애인 이민형(배용준)을 데리고 나타나면서 기막힌 사연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사실 ‘겨울연가’를 좋아하진 않는다. 2002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방영한 ‘겨울연가’는 MBC의 ‘상도’, SBS의 ‘여인천하’와 맞붙는 ‘죽음의 조’를 이뤘는데, 당시 나의 선택은 “뭬야~”가 인상적인 ‘여인천하’였거든. 젊은 층에서 ‘겨울연가’가 인기이니 화제에 끼기 위해서 짬짬이 보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소위 ‘한국 드라마 삼신기’인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증, 불치병이 다 나오며,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는 게으른 설정, 오매불망 첫사랑만 보는 거대한 첫사랑 신화, 사랑과 집착을 오가며 널을 뛰는 인물들의 감정선 등 진부한 점을 따지자면 논문을 써도 모자랄 정도다.
그런데 ‘겨울연가’를 섣불리 막장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건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절절한 감성 때문이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공간, 그 공간을 더욱 그림같이 서정적으로 만드는 윤석호 감독의 영상미, 그에 맞춘 애절한 OST, ‘눈물의 여왕’ 최지우의 아련함, 우수가 깃든 강준상과 여유로운 이미지의 이민형을 오가는 배용준의 연기,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한다는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더해지며 탄생한 ‘겨울연가’만의 압도적인 감성 말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준상이 민형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과정도, 약혼을 앞둔 유진에게 끌린다는 이유로 접근하는 민형의 뻔뻔함도, 민형이 교통사고가 나서 기억을 되찾고 준상으로 돌아오는 것도, 막판에 준상과 유진이 아버지가 같은 남매라 오해하고 그 와중에 준상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치명적인 후유증이 생길 수 있는 혈종이 생겼다는 것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던 건 그 감성 때문이었다. 분명 이야기는 너무 말이 되지 않는데, 남이섬 메타세쿼이아 숲길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마주치는 두 사람이 화면에 비추고 음악이 드리우는 순간 보는 이도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 눈발 날리는 스키장에서 두 사람이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보는 이도 애틋한 미소를 띠게 된다.
‘겨울연가’ 이후로 춘천 남이섬이 제주도 다음으로 많은 외국인이 찾는 관광지로 급부상하고, 민형(준상)이 유진에게 선물한 폴라리스(Polaris, 북극성) 모양의 목걸이는 일본에서만 30만 개가 팔리고, 200만 장의 OST 음반과 45만 세트의 DVD가 판매되고, 남자들이 배용준처럼 염색한 ‘바람머리’에 안경을 쓰고 꽈배기처럼 두른 목도리를 매치했던 것도 다 그 감성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 탓인지도 모른다. 서투르지만 무척이나 순수했던 10대의 사랑은 훗날 돌이켜봤을 때 아쉬운 마음이 들고 그리워지는 법. 그 그리움에 기억을 잃었어도 여전히 서로를 본능적으로 알아보며 ‘늘 그 자리에 있는 폴라리스처럼 당신의 폴라리스가 되겠다’는 운명적 사랑이 더해지니 이보다 더 낭만적일 수 없는 거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 거대한 첫사랑 신화가 불편하지만,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눈사람 만들며 풋풋한 첫 키스를 나누는 순수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까.
국내외에 3조 원에 달하는 경제 효과를 일으켰던 ‘겨울연가’는 세월이 지나 희극적인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지만(당장 지난 12월 12일에도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이 ‘겨울연가’의 배용준처럼 꾸미고 나왔다), 그건 18년이 지나도 패러디될 만큼 시대의 드라마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9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이들이 겨울 하면 영화 ‘러브스토리’를 자동으로 떠올리듯 ‘겨울연가’도 앞으로 18년이 더 지나도 겨울이면 생각나는 드라마일까? 끊임없이 ‘겨울연가2’ 제작설이 언급되는 걸 보면 18년 후에도 거뜬할지도.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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