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불쌍한 이들은 올해 대학 신입생들인 20학번이다. 입학식은커녕 대면 수업도 거의 받지 못하고 MT, 동아리, 축제 같은 ‘캠퍼스 라이프’를 즐겨보지 못한 ‘비운의 20학번’ 말이다. 낭만 찾으며 시간을 허비하는 게 가능했던 200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인지, 20학번 학생들이 하염없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거다. ‘캠퍼스 라이프’가 뭔지 감이 안 잡히는 20학번들을 위해 20년 전 드라마 ‘카이스트’를 추천해 본다. 요즘은 여행도 ‘랜선 여행’으로 하는 때니까, 대학 생활도 드라마로 간접 경험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한국과학기술원이라 불렸던 카이스트(KAIST)는 과학 인재 양성과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는 과학기술연구 수행을 위해 설립된 곳이란다. 설명만 들어도 나같은 문과생에겐 안드로메다처럼 멀게 느껴지는 곳인데, 신기하게도 그곳을 배경으로 한 ‘카이스트’는 무척 재미졌다. 천재, 영재, 수재들이 난무하는 카이스트이긴 하지만 어쨌든 대학생들의 우정과 사랑, 고뇌를 다루는 건 마찬가지니까. 파스칼의 삼각형이니 Y2K니 중력파 검출이니 로봇축구니 하는 건 1도 못 알아들었지만 말이다. 1999년 1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81부에 걸쳐 방영한 일요 드라마 ‘카이스트’는 과학을 연구하는 젊은 학생뿐 아니라 교수진, 대학원생들까지 한 명 한 명이 무척이나 개성 넘쳤다.
절친한 친구지만 어딘지 살리에르와 모차르트 같았던 전자전기공학과의 이민재(이민우)와 김정태(김정현), 한없이 털털하고 긍정적인 민재의 소꿉친구인 전산학과 박채영(채림)과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장학금에 목숨을 거는 까칠한 구지원(故 이은주), 학문에 있어서는 깐깐한 교수지만 일상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희정 교수(이휘향)과 툭하면 ‘히힛’ 하고 독특한 웃음소리를 내는 철딱서니없는 어린애 같지만 천재였던 박기훈 교수(안정훈), 이희정 교수를 보좌하는 넉살 좋은 대학원생 정만수(정성화)와 깐깐하게 만수를 갈구던 전자전기공학과 랩장이던 정명환(故 김주혁) 등등. 뒤로 갈수록 인물들이 빠지고 추가되면서 이나영, 추자현, 강성연, 김민정, 지성, 연정훈, 이규한 등 지금 보면 더 입이 떡 벌어지는 수많은 배우들이 ‘카이스트’를 빛냈다.
‘카이스트’가 재미었던 건 사랑 이야기에만 국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이토록 대학생의 삶에 순수하게 접근했던 드라마가 있었던가 싶다. 이희정 교수와 박기훈 교수의 대조적인 수업법도 그랬고, 드라마의 상당 시간을 수업을 듣고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집중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카이스트 안에서도 다양한 학생들이 존재했다. 공부보다 핀수영에 더 열을 올리는 학생도 있었고, 빌 게이츠가 장사꾼에 불과하다고 비난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모두가 박사를 꿈꾸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카이스트’는 과학으로 시작해서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어떤 꿈을 좇고 어떤 친구가 되고 싶은지, 결국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들여다본다.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부딪히며 성장하는 모습(심지어 교수들도)을 진솔하게 그려낸 것이 ‘카이스트’의 매력이었다. 그 과정이 오그라들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그려내서 나도 대학에 가면 저런 시간을 보내게 되는구나 하는 환상을 선사한달까.
듣기로는 이 드라마를 보고 공대에 로망을 가지고 진학한 학생들이 ‘낚였다’는 반응을 보였다는데, 나는 이과생이 아닌 ‘찐문과생’이라 드라마와 현실의 공대가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카이스트 학생들이나 카이스트가 아니더라도 이과생들이 ‘카이스트’를 어떻게 봤는지도 모르겠고. 그렇지만 대학에 가고 나서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저렇게 성실하고도 순수하게 무엇인가에 매진하는 사람들은 정말 드물다는 걸! 드라마 속 인물들이 로봇축구 때문에 밤을 샜다면, 나나 내 주변은 술을 마시거나 벼락치기로 시험준비할 때나 밤을 샜다고(우리만 그랬나?).
그래서 지금 ‘카이스트’를 다시 보면 많이 놀랍고 또 후회되고 아쉬운 부분도 많다. 저렇게 좋아하는 것에 미치도록 몰두하는 것도 다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 변명 같긴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비경제적인 일에 순수하게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못한다는 거, 심지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의지가 있어도 체력이 안 된다는 걸 슬슬 깨닫고 있거든. 민재, 정태, 지원 등 드라마 속 학생들처럼 그 나이 때에 좋아하던 일에 미친 듯 매달려 봤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하다못해 연애라도 열심히 할걸!).
00학번이든, 20학번이든, 곧 대학에 입학하게 될 21학번이든, 그리고 이과생이든 문과생이든 누구에게나 시간은 똑같이 흐른다. 20대이던 그때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절절한 40대는 지금 다시 ‘카이스트’를 보면서 아쉬워할 뿐이지만, 지금 이 드라마를 보는 20대는 부디 그런 아쉬움이 적은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비록 지금이 코로나 시대라도 말이다.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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