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20대에는 불같은 사랑을 원했다. 은근하고 느릿한 사랑 말고 오직 앞만 보며 온몸을 불사르는 격정적인 사랑.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20대였던 그 시절엔 ‘쿨’이 유행했다. 쿨하게 만났다가 쿨하게 헤어지는 게 시크해보였다. 시크하고 싶던 나도 상대가 조금이라도 질리면 쿨한 척 뒤돌아서곤 했다. 술 마시고 질척거리는 나의 쿨은 언제나 실패였지만.
2006년 방영한 드라마 ‘굿바이 솔로’의 주인공들도 쿨하고 싶어 한다. 어머니의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상처를 가진 김민호(천정명)는 친구 유지안(김남길, 당시 활동명은 이한)의 여자친구 정수희(윤소이)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부인한다. 친구의 여자를 탐하다니, 그처럼 쿨하지 못한 행동이 어디 있나. 걸핏하면 남자를 갈아치우는 어머니에 대한 반감이 있던 수희 또한 어느 순간 마음에 들어선 민호를 외면하려 한다. 뜨거운 마음을 다스리는 게 쿨은 아니건만.
민호와 지안의 친구인 최미리(김민희)는 어떻고. 나이 많은 건달 강호철(이재룡)에게 한눈에 꽂혀 3년째 아웅다웅 지내는 중이지만 ‘언제든 질리면 쿨하게 헤어지자’는 호철의 제안에 합의한 상태다. 민호의 집에서 민호 부모님과 함께 살며 민호 아버지(장용)의 회사에서 일하는 지안은 거짓말로 자신을 꽁꽁 감싼 채 수희에게 세상 젠틀한 남자친구인 척 군다.
스물일곱 살, 각기 다른 상처로 남들보다 성숙해 보이지만 젊디젊은 이들은 자신이 쿨할 수 있다고, 자신의 마음과 인생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마흔한 살 호철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 부모에 대한 상처, 보육원에서 자란 과거로 ’인생은 돛대처럼 홀로 가는 것‘이라 외치는 호철은 미리보다 인생의 본질을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또한 장난처럼 만난 미리와 언제든 갈라설 수 있다고 쉽게 호언장담한다.
이들의 ‘쿨병’을 단번에 박살 내는 건 오영숙(배종옥)이다. 영숙은 명문대를 나왔다고 거짓말하며 남편을 만났고, 그가 교수가 될 때까지 뒷바라지한 인물이다. 열심히 돈을 벌어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 유학까지 보냈건만 거짓말을 들켜 버렸다. 그 뒤 남편에게 ‘천박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강제 별거 중이다. 남편이 내건 조건을 이행하고자 민호의 형 김민재(김현균)에게 꼬박꼬박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도 남편과 아이들에게 내쳐지기 싫기 때문이다. 그러니 쿨하겠답시고 태연하게 호철로부터 돌아선 미리가 영숙에게 얼마나 어려 보였을까.
“개나 소나 쿨, 쿨··· 좋아들 하시고 있네.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이 언제나 쿨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본다, 나는. 내가 하나 가르쳐 줄까? 진짜 쿨한 게 뭔지? 진짜 쿨한 게 뭐냐면, 진짜 쿨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게 진짜 쿨한 거야. 좋아서 죽네, 사네 하는 남자가 나 싫다 그러는데 ‘오케이 됐어’ 한방에 그러는 거 쿨한 거 아니다? 미친 거지.”
청각장애를 가진 가족을 뒤로 한 채 캐나다로 교환 교수로 떠난 부모가 있다고 거짓말하는 지안의 인생 또한 절대 쿨할 수 없다. 가족들의 판잣집 동네를 철거하는 세림건설 사장 아들 민호를 고등학생 시절 만나 거짓으로 꾀어낸 뒤 퇴학당하게 만든 지안은, 결국 인생의 절반 가까이 거짓으로 산다. 거짓으로 시작된 우정 관계인 민호는 물론 지안을 회사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민호 아버지 주민(장용)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지안의 가짜 부모 사진을 보고 인상이 너무 좋다고 말하는 여자친구 수희에게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지안은 한결 더 외롭다. 그 외로움은 자신이 자처한 것이지만, 그렇게 거짓으로 자신을 둘러싸야 했던 마음이 일견 이해되기에 더욱 안쓰럽고 짠하다.
‘굿바이 솔로‘는 민호와 수희와 지안, 미리와 호철의 사랑과 어느 순간 이들 사이에 눌러앉은 영숙, 그리고 세상에 귀와 입을 닫은 채 따스한 밥과 정을 나누는 미영이 할머니(나문희)의 사연이 교차된다. 입만 열면 명대사인 영숙은 물론이요, 대사 한 마디 있는(사고당할 뻔한 아이를 구할 때 내지른 ”안돼!“) 미영이 할머니의 짠한 이야기도 있다. 남녀 주인공을 필두로 기껏해야 서브 남녀 캐릭터를 붙여 ’남2, 여2‘ 4인 정도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기존 드라마와 달리 ’굿바이 솔로‘는 주연급만 일곱이다. 성별도, 연령도, 살아온 환경도 천차만별인 이들에게 공통점이라곤 세상 누구나 그렇듯 저마다의 상처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제법 크고 깊은 상처들.
다중적 스토리를 펼쳐 보인다는 점에서 ‘한국 TV판 러브 액츄얼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러브 액츄얼리’가 달콤쌉싸름 예쁜 초콜릿 같다면 ‘굿바이 솔로’는 뜨끈한 국밥 같은 느낌을 준다. 허기진 위와 영혼을 동시에 달래주는 국밥. 노희경 작가의 모든 작품에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그 뜨끈하고 정겨운 휴머니즘을 ‘굿바이 솔로’에서도 만날 수 있다.
쿨해야 멋져 보인다는 생각이 즐비한 세상에서 ‘굿바이 솔로’가 말하는 뜨끈함은 촌스러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놈의 쿨이 순간순간 사람의 뼈를 시리게 한다는 걸 깨닫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노희경 드라마를 본다. 지금은 영숙과 호철의 나이가 되었을 민호, 수희, 미리, 지안도 이제는 알았겠지. 쿨한 사랑, 쿨한 인생은 없다는 걸.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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