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덤으로 얻은 베를린에서의 한 달. 살던 집을 정리하고 이사 온 에어비앤비는 베를린의 전통적인 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독일식 고택들이 좁은 골목 사이사이 밀집해 있는 이곳은 전에 살던 곳에서 10분도 채 떨어지지 않은 위치임에도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덕분에 코로나가 유럽대륙에서 미친 듯 재유행하는 지금,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필수적인 외출 외에는 밖으로 나서기가 두려워 ‘집콕’ 해야만 하는 상황에 그나마 소소한 위안이 된다.
에어비앤비에 딸린 작은 테라스에 커피 한 잔 들고 앉아 전형적인 유럽 분위기가 나는 집들을 구경하고, 떨어지는 낙엽들로 가을을 만끽하며, 어쩌다 잠깐씩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행복해한다. 귀국을 위한 모든 번거롭고 머리 아픈 절차가 끝나 이제는 떠나는 그 날까지가 온전히 ‘내 시간’이니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어도 더디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하루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마치 ‘베를린 한 달 살기’ 하러 와 있는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면서도, 마트를 가고 빵을 사는 등 생활을 위한 특정 반경 외에는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없는 이 역설적인 상황조차 생각을 달리하니 그리 나쁘지 않다. 이미 베를린의 모든 것에 익숙하고 많은 것을 누렸으니 때론 기억을 곱씹고 추억을 꺼내며 차분하게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나름 의미 있을 테니까.
아침마다 죽은 자들의 공간에서 삶을 생각해보는 루틴이 생긴 것도 이사를 오면서 생긴 베를린살이 막바지의 변화다. 임시 거처 인근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공원묘지가 있다. 걸어서 3분도 안 되는 지척에 화려한 그래피티 벽과 그보다 더 화려한 단풍나무로 둘러싸인 공원묘지를 한 바퀴 걸으며 산책하는 동안 마음은 더없이 차분해지고 많은 상념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호화롭게 치장된 묘, 소박함 그 자체인 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두 어린 형제의 묘, 누군가 방금 다녀간 듯 따뜻한 초가 켜 있는 묘, 잡초만 무성히 자라있는 묘, 가족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묘 앞에 오랜 시간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쓸쓸한 노인의 모습, 새로 사온 꽃을 꽂으며 묘를 정비하는 누군가…. 산책 중 만나는 다양한 형태의 묘와 사람들을 보며 나는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해, 죽은 자와 산 자의 연결고리에 대해, 나의 가족들과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매일 상념의 형태는 달라지지만 대체로는 오늘 하루 또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얻어서 돌아온다고나 할까. 김영민 교수가 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했는지 그 이유 중의 하나를 찾는 시간이다.
공원이면서 묘지이고 묘지이면서 공원인 그곳은 이제 더 이상 내가 애써 ‘공원’이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일상 속 자연스러운 장소가 됐다. ‘깨달음’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붙일 필요도 없다.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 어디를 가든 주택가 한 복판, 산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연스레 녹아든 공원묘지를 접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묘지’라는 단어가 주는 편견이 사라져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베를린 생활 초창기, 독일인 친구는 매번 만날 때마다 공원묘지 산책을 권하며 물었다. “너는 거주지에 공원묘지가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내가 아는 아시아인들은 대체로 불편해하더라고.” 그 친구의 집 건너편에는 큰 규모의 시립 공원묘지가 있는데 많은 시민들이 방문 목적과 상관없이 그곳을 산책하기를 좋아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주변에 녹지가 차고 넘치는 베를린에서 굳이 공원묘지를 산책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지만 나는 친구의 질문에 ‘불편하지 않다’라고 답했다. 솔직한 답이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애초에 공원묘지를 이유 없이 산책한다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았을 테니까. 거주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일 년에 한두 번 성묘 목적이 아니면 갈 일 자체가 없는 한국식 공원묘지가 익숙한 나에게는 당연한 일.
이런저런 이유로 실제로 그 친구네 집 앞 공원묘지를 방문하게 된 것은 1년여 전 쯤의 일이다. 햇볕이 따가웠던 여름날, 친구네 집 근처를 걷게 된 우리는 햇빛을 피하기 위해 나무 그늘이 많은 공원묘지에 가기로 했다. 그늘도 그늘이었지만 나는 ‘그림 형제의 묘가 그곳에 있다’는 말에 혹했다. 반쯤은 무슨 관광지를 찾는 심정으로 공원묘지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림 형제의 묘를 보기도 전 이미 사람들이 공원묘지를 산책하기를 즐겨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람의 손에 의해 잘 관리돼 있지만 어딘가 관리되지 않은 숲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그곳에선 더없는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넓은 공원 안에는 인적도 많지 않았고, 몇몇 방문자들도 조용히 걷거나 벤치 등에 앉아 있거나, 묘지를 정비하는 등 각자의 할 일에 충실했다. 장소의 특성 상 누구 하나 큰 소리로 말하거나 떠드는 이도 없었다.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럽 내 다른 나라를 여행하던 중에 유명인의 묘지를 보기 위해 부러 특정 공원묘지 등을 찾았던 적은 있지만, 거주지 한 복판에 들어선 일반인들의 묘지로 만들어진 공원묘지를 산책하고 있자니 죽음이라는 무거운 화두가 너무나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는 기분이었다.
여행을 가면 공원묘지부터 찾는다던 지인의 이야기가 생각나면서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안타깝게도 살던 동네에는 공원묘지가 없어서 그 후 한두 번 더 친구네 집 근처 공원묘지를 산책하고, 독일 통일 당시 서독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 총리의 묘지를 찾아 베를린 외곽의 거대한 숲 공원묘지를 가본 게 전부였지만, 횟수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이미 공원묘지에 대한 생각 자체가 달라져 있었으므로.
이사 온 에어비언비 인근에 공원묘지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반가웠다. 첫 방문하던 날 아침, 공원묘지 입구 왼쪽으로 빵을 사러 온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던 풍경이 한 눈에 담기는 것을 보며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빵집과 묘지, 산 사람들의 시간과 죽은 사람들의 시간이 공존하는 모습, 이게 진짜 삶의 모습 아닐까. 아니 ‘삶과 그 이후’라고 해야 하려나.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2017년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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