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아내와 자식이 있는 40대 남자와 젊디젊은 20대 여자의 사랑. 흔한 말로 불륜, 색안경 끼고 보면 원조교제로 불릴 테다. 드라마에서 자주 선택되는 불륜 소재는 그 대상을 누구로 하느냐, 그리고 그 관계를 어떤 결로 그리느냐에 따라 고품격 드라마와 막장 드라마로 확연히 갈린다. 하지만 드라마 시청자 중 여성 시청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까닭인지, 유부남과 젊은 여자의 사랑은 유부녀와 젊은 남자의 사랑에 비해 비난을 많이 받는 편. 불륜을 저지르고도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부르짖었던 ‘부부의 세계’ 이태오를 생각해 보라(물론 이태오는 뻔뻔해도 너무 뻔뻔했다).
설령 기혼남녀의 불륜이 아닐지라도 나이차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는 사랑은 대체로 환영받지 못한다. 46세 유부남 윤성재(이경영)가 자기 나이의 반밖에 되지 않는 23세 이신우(이요원)를 만나 사랑에 빠졌던 드라마 ‘푸른 안개’는 불륜과 나이 차라는 이중고를 잘 그려낸 드라마. 많은 드라마들이 주요 시청자인 여성의 시각에서 드라마를 전개하는 것과 달리 ‘푸른 안개’는 중년 남성의 시선에 따라 진행되면서 단순히 불륜이라 치부할 수 없는 섬세한 심리와 감정을 쫓았다. 어떤 이에게는 나이 많은 남자의 노추(老醜)로 비쳐질지 몰라도, 이금림 작가의 뛰어난 대본과 표민수 PD의 감각적인 연출, 그리고 이경영이란 배우의 빼어난 연기가 어우려져 ‘푸른 안개’는 수작으로 남았다. 20대였던 방영 당시에는 잘 몰랐던 감정이, 중년에 입성하는 지금 다시 보니 더 진하고 절절하게 느껴진다.
윤성재는 명문대 졸업 후 중매로 만나 결혼한 아내 노경주(김미숙)의 집안 덕에 한 회사의 사장을 맡고 있으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빛 좋은 개살구다. 그룹 회장을 맡고 있는 아내의 작은아버지와 아내의 사촌동생 노 전무(김일우) 때문에 실권은 하나 없는 허울 좋은 사장에 불과하다. 게다가 함께 사는 장모(정혜선)는 매일 창업주였던 장인의 뒤를 이어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가져와야 한다고 닦달이고, 그렇다고 마음을 터놓기에는 교양 넘치는 완벽주의자 아내 경주는 부담스럽다. 남들의 시선에선 성공한 중년 남성의 표본이지만 정작 자기에게 남은 건 남보다 일찍 쇤 희끄무레한 머리와 스트레스로 인한 오십견뿐인 것 같다.
그때, 우연히 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이신우를 만난다. 생동하는 젊음, 두려움이라곤 없어 보이는 패기가 신선했다. 당연하다. 지금 나도 스쳐 지나가는 청춘들을 보면 그저 보기만 해도 절로 흐뭇한 감정이 들 때가 있으니까. 여성만 갱년기가 있는 게 아니다. 40~50대 남성들도 갱년기를 겪는다. 성재에게 신우는 지나간 나의 젊음을 느끼게 하는 눈부신 존재이자, 늦었지만 지금 나도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존재다. 누군가 오버랩된다면, 맞다. 2014년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밀회’의 오혜원(김희애)-이선재(유아인)와 윤성재-이신우는 묘하게 닮았다. 성재와 달리 오혜원의 부부 사이는 완전히 비즈니스 파트너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기본 결은 비슷하다. 다른 사람들이 성공이라 여기는 것에 몰두하느라 자신을 잃어버렸던 주인공이 자신에게 다가온 젊은 이성을 통해 자신을 찾는 것.
불륜과 나이 차라는 이중고 때문인지, 당시 방송의 수위 때문인지 ‘푸른 안개’에서 성재와 신우는 입맞춤 외에 육체적 관계를 갖지 않는 것으로 묘사된다. 신우의 성장배경도 한 몫 한다. 어릴 적 아버지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외도하던 어머니 영희(이보희) 때문에 어머니를 미워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자랐기에 성재에 대한 신우의 사랑은 일찍 여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치환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 주변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랑은 결국 끝날 거라 말하는 것은 물론 성재 자신도 자신의 욕심 때문에 신우를 붙잡지 말아야 한다고 계속 되뇌는 것은 그 또한 신우의 사랑이 일정 부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됐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밀회’와 달리 ‘푸른 안개’의 성재는 나를 찾는 데는 성공하지만 사랑을 지속하는 데는 예정대로(?) 실패한다. 성재의 딸 주희(이나리)의 간절한 호소를 듣고 어린 주희를 자신처럼 상처받은 아이로 자라게 할 수 없다고 뒤늦게 신우가 깨닫는 때문이기도 하고, 조금만 더 곁에 있어주면 안 되겠냐고 간청할지언정 신우를 적극적으로 붙잡지 않는 성재의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 서로의 사랑을 깨닫고 입맞춤을 한 뒤 그들은 이런 말을 나눴다. “넌 왜 그렇게 겁이 없니?” “아저씬 왜 그렇게 겁이 많아요?”
그랬던 그들이, 서로를 만나 변한다. 인생의 반환점을 지나 마음이나마 다시 청춘의 결로 인생을 살아보고자 하는 남자와 인생의 반환점을 향해 성장하고 성숙하는 여자의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아저씨랑 함께라면 지옥도 상관없다”던 신우는 어른이 된다. 헤어짐을 고하는 신우에게 성재가 하는 말이 그래서 가슴 아프다. “나는 너를 만나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가 되었는데, 너는 나를 만나 어른이 된 것 같구나.”
신우를 만나 푸른 안개 속을 헤매듯 방황하던 성재는 신우를 보내고 다시 평온했던 일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안개 속을 헤매던 경험이 자신을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신우가 떠나고도, 아내 경주가 돌아왔으면 하는 여지를 남겼어도 성재는 돌아가지 않았다. 소도시에서 어릴 적 꿈이었던 책방 주인을 하겠다고 한다. “꾀죄죄하게 책방에 앉아 책 파는 것이 자네의 자아 찾기였나?”라고 묻는 선배(이희도)에게, “꾀죄죄하다는 기준이 뭔가요? 우리 인생이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이 아니잖아요”라고 말할 수 있는 단단함이 생겼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러겠지. 어린 여자한테 정신이 팔리더니 결국 직업도 잃고 가정도 잃고 인생 망했다고, 인과응보라고. 그러나 정말 그럴까? 늙지도 젊지도 않은 40대에,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온전한 자신의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사는 것을 꼭 망했다고 볼 순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성재는 그랬으니까. “세상사람 모두가 날 욕하겠지요. 자아 찾을 데가 그렇게 없어 여자를 이용했냐고. 난 단지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인해 내 자신을 찾은 것뿐, 변명하고 싶지 않아요. 그 앨 사랑한 것도 더없이 소중했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내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건 사랑이 남긴 선물이었어요.”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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