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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의 일생②-은둔의 경영자, 신경영 대장정에 나서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프랑크푸르트 선언·화형식 등 '극약처방'으로 초일류 삼성 시동

2020.10.25(Sun) 14:43:14

[비즈한국]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2014년 5월 자택에서 호흡곤란과 심장마비로 쓰러진 뒤 6년 넘게 병상에 있던 중이었다. 삼성전자가 지금과 같은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한 데는 이 회장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정치권과의 갈등을 부르기도 했고, 그룹 승계 문제로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의 생애를 여기에 정리해 본다.

 

(※이건희의 일생①-두 형을 제치고 삼성 후계자가 되다에서 계속됩니다.)

 

취임 초 이건희 회장은 ‘제2창업’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을 외치며 변화와 개혁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첫 번째 관문은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공고하게 쌓아놓은 비서실이었다. 1990년 이건희 회장은 비서실 15개 팀을 10개로 축소했고, 12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동갑내기 소병해 비서실장을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전격 전출했다. 

 

1991년 이창희의 사망으로 형제간 재산 분할 협의가 신속하게 진행됐다. 그 결과 누나 이인희에게는 전주제지와 고려병원, 여동생인 이명희에게는 신세계백화점을 떼어줬다. 1995년 가족회의를 통해 제일제당, 안국화재는 이맹희 명예회장 집안으로 넘어가 이재현 제일제당 상무 몫이 됐다. 제일합섬은 새한미디어에 편입돼 이창희의 부인 이영자와 아들 이재관에게 넘어갔다. 1992년 이 회장은 100명의 새 임원을 발탁하는 등 217명의 임원 승진 인사를 단행하며 이건희 체제를 준비했다. 

 

이건희 회장은 취임 후 5년간은 외부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룹 사장단 회의는 강진구 삼성전자 회장이 주재했고,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도 다른 임원이 대리 참석했다. 이 회장이 ‘은둔의 경영자’로 불리게 된 이유다.

 

1988년 3월 22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삼성그룹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이건희 회장. 사진=연합뉴스


1993년 이 회장은 그동안 준비한 미래 전략을 들고 경영 일선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1월 31일 임원들을 데리고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향했다. 삼성전자가 세계최초로 8mm VCR을 개발했다는 뉴스가 2월 1일 보도된 가운데, LA의 한 가전매장을 방문했다.

 

매장에는 GE, 소니, 필립스, 도시바, 월풀 등의 제품이 전면에 진열돼 있었고, 삼성 TV가 매장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처박혀 있었다. 국내 일류라고 자랑스러워했던 삼성 제품의 현주소를 직접 목격한 것이다. 이 회장은 임원들과 함께 현지에서 세계 주요 전자제품과 삼성 제품의 디자인과 품질을 비교하는 회의를 열었다. 

 

‘LA 회의’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한 임원이 전년 수출 부진의 원인을 계열사 탓으로 보고하자, 이 회장은 고함을 지르며 이 임원을 쫓아냈다. “세계시장에서 피 말리는 경쟁을 하는데 계열사와 협력을 해도 모자랄 판에 책임을 전가할 수가 있느냐”는 이유였다. 회의는 9시간 지나서야 끝이 났다. 이 회장은 저서 ‘이건희 에세이-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1987년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내가 제일이다’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조직 전체에 위기의식을 불어넣는 것이 필요했다. 이듬해 ‘제2창업’을 선언하고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50년 동안 굳어진 체질이 너무도 단단했다. (중략)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해에 체중이 10kg 이상 줄었다.”

 

1993년 6월 7일 그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나온 배경에는 두 가지 직접적 원인이 있었다. 이 회장은 LA 회의 후 임원들의 의식이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6월 1~4일 일본에서 임원 회의 후 일본인 고문 후쿠다 타미오가 ‘사표 쓰기를 각오하고’ 작성한 보고서 ‘경영과 디자인(후쿠다 보고서)’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보고서의 내용은 삼성전자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경고장과 같았습니다. 후쿠다가 그것을 사업본부장에게 수없이 올렸는데도 안 먹히니 마지막으로 물러날 각오를 하고 나에게 올렸다고 되어 있었어요. 기가 막히고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비서실장이고 본부장이고 사장이고 몽땅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요. 모두가 나를 속인 것이죠. 소위 측근이라는 사람들이 이 정도라면 나머지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6월 5일 프랑크푸르트로 떠나기 전 하네다공항에서 삼성 사내방송팀이 제작한 비디오테이프 한 개가 도착했다. 세탁기 조립과정을 담은 30분짜리 영상물에는 플라스틱 뚜껑의 부품이 맞지 않자 칼로 깎아낸 뒤 조립하는 장면, 뚜껑을 잘라내던 직원이 현장을 떠나자 다른 직원이 투입돼 플라스틱을 깎는 장면이었다.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 회장은 이학수 비서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장과 임원들 200여 명을 모두 프랑크푸르트로 집결시키라고 명령했다.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팔켄슈타인 호텔에서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꿔야 살아남습니다”라며 임원들에게 공장 가동을 중단해서라도 불량품이 나오지 않도록 지시했다. 

 

프랑크푸르트 회의는 6월 24일까지 이어졌는데, 하루는 이 회장이 임원들에게 자신의 발언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수빈 비서실장이 “아직 양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질과 양은 동전의 앞과 뒤입니다”라고 하자 손에 들었던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 던져버리고 나가버렸다. 삼성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스푼 사건’이다.

 

프랑크푸르트 이후에도 68일에 걸쳐 1800명과 350시간, 사장단과는 800시간에 걸친 회의가 이어졌다. 8월 4일 도쿄 회의를 마지막으로 ‘신경영 대장정’이 끝났다. 10월 23일 신경영 실천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삼성 비서실은 11개 팀을 8개로, 5개 경영팀을 2개로 축소통합하고, 인원을 100명으로 소수정예화했다. ‘양질 논쟁’으로 개혁의 뒷다리를 잡았던 이수빈 비서실장 자리를 현명관 삼성종합건설 사장으로 교체했다. 개혁의 칼을 휘두르는 데는 내부인보다 감사원 출신의 외부인사가 적격이라는 판단에서였다.

 

1997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삼성그룹 전략회의 모습. 오른쪽이 이건희 회장. 사진=연합뉴스


1994년 3월 9일에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선 2000여 명의 임직원들이 모인 가운데 무선전화기, 키폰, 팩시밀리, 휴대폰 등 15만 대의 제품 500억 원어치를 망치로 부수고 불을 붙이는 화형식이 열렸다. 불량제품에 대한 이 회장의 극약처방이었다. 1994년 국내 4위였던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시장점유율은 1995년 1위로 뛰어올랐다. 삼성전자가 세계 1위로 도약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1996년 신년사에서 이 회장은 “그룹 각사는 금년 중 최소한 1개 이상의 세계 일류 제품을 반드시 확보할 것”을 주문했다. 2000년 신년사에서는 “1등 제품은 양적 시장점유율뿐만 아니라 그 질적 가치, 수익력, 브랜드 이미지 등이 모두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의 ‘1등주의’는 경쟁사회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2005년 4월 이 회장은 사장단을 이끌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디자인 전략회의를 가졌다. 이 회장은 “삼성의 디자인 기술은 아직 부족하다. 애니콜만 빼면 나머지는 모두 1.5류다. 이제부터 경영의 핵심은 품질이 아니라 디자인”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삼성 제품의 디자인 수준은 질적으로 비약했고 삼성전자 휴대폰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는 데 기여했다. 

 

삼성전자는 2009년 매출 136조 원으로, 독일 지멘스(127조 원)와 미국 휼렛패커드(133조 원)를 넘어서 세계 최대 전자회사로 등극했다. 삼성전자의 독주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2018년 삼성전자는 매출 243조 원, 영업이익 58조 원의 사상 최대 매출과 영업이익을 냈다. 2019년엔 매출 230조 원, 영업이익 27조 원으로 부진했다.​ 

 

(※이건희의 일생③-구설수들 그리고 씁쓸한 만년으로 이어집니다.)  

우종국 기자

xyz@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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