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2014년 5월 자택에서 호흡곤란과 심장마비로 쓰러진 뒤 6년 넘게 와병 중이었다. 삼성전자가 지금과 같은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한 데는 이 회장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만큼 그는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정치권과의 갈등을 부르기도 했고, 그룹 승계 문제로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의 생애를 정리해본다.
이건희는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고 이병철 삼성 회장(1910~1987)과 박두을 씨(1907~2000)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맹희, 창희 그리고 누나 인희, 숙희, 순희, 덕희, 동생 명희가 있다.
이병철 회장은 1938년부터 대구 서문시장에서 삼성상회를 운영했다. 청과물, 건어물을 만주 등으로 파는 무역회사로 커가는 중이라 사업에 바빴던 부모는 어린 이건희를 젖 떼자마자 의령 친가로 보내 광복 때까지 할머니 아래서 키웠다. 1945년 다시 대구로 돌아온 뒤에야 아들을 데려왔다. 이건희는 그때까지 할머니가 어머니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의 사업이 커지면서 가족들은 1947년 서울로 이사했고 이 회장은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 이건희는 1949년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산, 대구, 부산으로 옮겨 다니며 다섯 번 전학을 해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가 타지생활의 어려움으로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귀국했다.
고 이맹희 CJ 명예회장의 저서 ‘묻어둔 이야기’에는 어린 이건희가 일본에 머물 때 이병철 회장의 일본인 내연녀인 쿠라다와 그의 자녀인 이태휘, 이혜자와 함께 지낸 것으로 나온다. 일본 유학 당시 이건희는 일주일에 여덟 편 이상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정도로 영화에 심취했고 영화감독을 꿈꾸기도 했다.
서울대사범대학부속중학교를 졸업하고 사대부고에 입학한 이건희는 레슬링부에 들어가 전국대회에서 입상했다. 그러나 2학년 때 연습 도중 눈썹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자 어머니가 교장에게 레슬링부에서 빼달라고 해 그만두어야 했다.
고교 동창들은 이건희가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부자 티를 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새 교복을 일부러 빨아 낡은 것처럼 하고 입고 다녔다. 그와 동창이자 올해 6월 작고한 홍사덕 전 의원은 “시골 촌놈인 내 눈에도 완벽하게 비위생적인 군용 천막 안 즉석 도넛 가게에 그는 털썩 주저앉아 잘도 먹어치웠다”고 회상했다.
이건희는 1961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곧장 일본 와세다대학교 상학부로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 이병철 회장은 와세다대 전문부 정경과를 2년간 수료했다. 당시 이건희는 학업에 큰 관심이 없어 낙제를 면할 정도로만 공부를 했다. 용돈 사용 내역을 일일이 아버지에게 보고할 정도로 유학 생활이 풍족하지만은 않았다.
1965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이건희는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입학해 1년 6개월 동안 경영학과 매스컴학(부전공)을 공부했다. 1966년 여름방학 때 멕시코 여행을 떠났다가 미국 비자가 만료돼 귀국하려 했으나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그해 5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발생하면서 9월 이병철 회장이 전격 은퇴 선언을 할 정도로 삼성에 대한 국민 여론이 나빴기 때문이다. 무소속 김두한 의원이 국회에서 정부 관료들에게 “이건 국민들이 나눠주는 사카린이니 골고루 나눠먹어라”고 소리치며 인분을 뿌린 일화는 유명하다.
그해 가을 이건희는 부모들끼리 합의한 정혼자인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을 일본에서 만난다. 그와 선을 보기 위해 일본에 온 홍라희와 그의 어머니를 하네다공항에 나가 마중했다. 홍라희의 아버지 홍진기는 일제강점기에 판사를 지냈고, 미 군정청 법제관, 자유당 정권 아래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홍석조 BGF리테일 회장,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은 홍 전 관장의 친동생들이다.
홍진기는 4·19 당시 시위대에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이유로 5·16 이후 군사법정에 의해 사형을 구형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홍진기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 집행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 이건희와 홍라희는 인사만 하고 헤어진 뒤 다음날 둘이 만나 영화 ‘닥터 지바고’를 관람했다. 다음 해인 1967년 1월 두 사람은 약혼을 하고 홍라희가 대학교를 졸업한 뒤인 4월에 결혼했다.
이건희는 1966년 삼성빌딩 비서실에 견습사원으로 첫 출근했다. 아침마다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고, 이병철 회장을 24시간 따라다니며 수행하는 것이 임무였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은퇴 선언을 한 뒤였고, 1967년 7월 삼성 사장단 회의에서 이 회장은 장남 이맹희를 삼성의 총수로 정한다고 선언했다. 이건희는 못 다한 학업을 마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1968년 말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를 다시 불러들여 중앙매스컴 이사로 임명했다. 중앙매스컴은 1964년 라디오서울, 동양텔레비전방송을 개국했고, 1965년 ‘중앙일보’를 창간했다. 경영은 이병철 회장의 사돈이자 이건희의 장인인 홍진기가 맡았다.
이때는 이병철 회장이 세 아들 중 삼성의 후계자가 누가 될지를 저울질하던 시기였다. 장남 이맹희에게 경영을 맡겼으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등의 처리과정에서 신뢰가 훼손됐다. 이병철 회장은 사카린 밀수가 박정희 정권이 비밀리에 지시한 대로 했다가 배신당했다고 여겼지만, 이맹희는 몇몇 기업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밀수한 것으로 여겼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구속됐다 풀려난 차남 이창희는 사돈 홍진기가 이건희를 앞세워 삼성을 장악하려 한다고 믿고 이건희와 홍진기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창희는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병철 회장이 부정한 짓을 저질렀으니 기업에서 영원히 손 떼야 한다는 탄원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다. 100만 달러 해외 밀반출, 현충사 조경비 부풀리기, 탈세 등이 이유였다. 대로한 이병철 회장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마라”며 이창희를 미국으로 쫓아냈다. 이창희는 1991년 미국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이병철 회장은 이창희의 탄원서 배경에 이맹희가 있다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이맹희의 경영능력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던 이병철 회장은 1968년 경영 일선 복귀와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했다.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 소식이 알려지자 금성사(현 LG전자), 대한전선, 동남전기 등 기존 전자업체들이 발칵 뒤집혔다. 럭키그룹(현 LG그룹) 총수 구인회의 아들 구자학은 이병철의 딸 이숙희의 남편이었는데, 구인회는 삼성 계열사인 중앙개발 사장이던 구자학을 본가로 불러들일 정도로 양가의 불화가 깊어졌다.
1973년 여름 이병철 회장은 이맹희를 불러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채근했다. 이맹희는 6개월 동안 하는 일 없이 보내다가 일본으로 쉬러가며 그룹 경영에서 물러나야 했다.
훗날 이건희 회장은 인터뷰에서 “1973년인가 후계 구도가 내막적으로 정해질 때 선대 회장께서 ‘맹희도 안 되겠고 창희도 안 되겠다. 건희 네가 해야 되겠다’고 하셨다”라고 밝혔다. 애초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에게 중앙일보,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중앙개발 3개사를 물려줄 계획이었다. 집안에서도 이건희의 성격이 고분고분하지 못하고 사교적이지 못해 기업가로선 맞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에게 하나씩 계열사 경영을 물려주면서 1979년쯤엔 후계자로 지목했다.
이병철 회장이 셋째아들의 능력을 보게 된 것은 한국반도체 인수였다. 이건희는 이병철 회장에게 1974년 1월 설립된 한국반도체 인수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건희는 그해 12월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미국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나 드나들며 반도체에 매달렸다. 이병철 회장은 1977년 삼성이 한국반도체의 나머지 지분을 인수하도록 했고 1978년 사명을 삼성반도체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1위를 달리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의 시초다.
1979년 2월 이건희는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공식적으로 삼성 후계자가 되었음에도 후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여자 문제, 마약 중독, 괴팍한 성격 등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았다. 이건희 부회장은 혼외자식 소문을 잠재우려 막내 이윤형(2005년 사망)을 낳은 뒤 정관수술을 했다는 것을 인터뷰에서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괴소문이 이맹희의 짓이라고 판단한 이병철 회장은 장남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시도했다. 이맹희의 집에 괴한이 들이닥쳐 집기류를 실어내기도 했다. 아버지를 피해 평생을 은신하며 살던 이맹희 명예회장은 2015년 중국 베이징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이병철 회장은 1976년 위암 판정을 받은 뒤 수술을 받았으나 1986년 재발해 1987년 11월 19일 사망했다.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자 사장단은 이건희 부회장을 삼성그룹 회장으로 추대했다. 12월 1일 이건희 회장은 취임식을 갖고 공식 회장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이건희의 일생②-은둔의 경영자, 신경영 대장정에 나서다로 이어집니다.)
우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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