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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전두환 정권에 강제해체 당한 국제그룹

고무신으로 시작해 재계 7위까지 성장…전두환 정권에 밉보여 '비운'

2020.10.22(Thu) 17:06:53

[비즈한국] 1993년 7월 29일 헌법재판소는 “전두환 정부가 국제그룹 해체를 지시한 행위는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위헌 판결한다”라며 국제그룹 해체 사건과 관련해 정부에 소송을 제기한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이미 빼앗긴 국제그룹이 양정모 회장에게 돌아오진 않았다. 

 

‘국제그룹 해체 사건’은 1985년 전두환 정권의 산업합리화 정책, 즉 부실기업 정리와 함께 시작됐다. 전두환 정권 눈 밖에 났던 양정모 회장은 국제그룹이 해체되기 30분 전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한때 재계 순위 7위, 21개의 계열사를 거느렸던 국제그룹은 그렇게 해체됐다.

 

1993년 7월 29일 국제그룹 해체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후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국제그룹복권추진위원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연합뉴스


#‘왕자표 고무신’으로 시작한 국제그룹

 

국제그룹은 양정모 회장이 1947년 부산 동구에 국제고무공장사를 설립하며 시작됐다. 전 국민이 고무신을 신던 당시 ‘범표 고무신’, ‘말표 고무신’ 등 여러 브랜드의 고무신이 시장에 나왔지만 모두 국제고무공장사에서 나온 ‘왕자표 고무신’ 앞에 꼬리를 내렸다. 당시 고무신은 고무 배합 등 여러 품질 문제가 즐비했는데, 왕자표가 가장 품질이 좋았기 때문이다. 

 

1960년 3월 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62명이 숨지고 39명이 다친 사고로 성장에 제동이 걸린다. 그러나 양정모 회장은 국제화학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고무신 대신 운동화를 제작하며 성장을 이어나갔다. 산업화가 시작되고 국민소득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고무신보다 운동화의 수요가 높아지던 시기였다. 

 

1962년 양정모 회장의 왕자표 운동화는 국내 최초로 미국에 수출됐다. 싸고 질 좋은 운동화로 인정받으며 불티나게 팔렸다. 1970년대 왕자표 운동화는 미국의 마라톤 전문지에서 최고 품질의 운동화로 평가받는다.

 

국제화학은 1973년 사명을 국제상사로 변경하고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국제상사는 ​1975년 11월 ​정부로부터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된다. 삼성물산, 대우실업, 쌍용산업 다음으로 국내 네 번째 종합상사였다. 

 

당시 기업들은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정부가 수출을 장려하던 터라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면 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 7%의 이자만 내면 됐기 때문이다. 일반 기업은 그보다 2배인 15%의 이자를 내던 때였다. 

 

#국제그룹의 도약과 프로스펙스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된 이후 국제상사는 본격적으로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도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기업에 금융 혜택을 주었다. 국제상사는 조광무역, 인실제강, 국제종합엔지니어링, 연합철강 등을 지속해서 인수하고 호텔업, 건설업까지 진출했다. 1980년에는 국제그룹으로 거듭났다.

 

당시 양정모 회장은 소득수준이 높아진 국민들이 해외 브랜드인 나이키, 아디다스 운동화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인지했다. 또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 유치로 스포츠 용품 수요가 높아질 것으로 예측했다. 1981년 국제그룹은 ‘프로스펙스’를 출시한다.

 

국제그룹은 막대한 자본력으로 프로스펙스를 홍보했고, 당해 미국 마라톤 월간지인 ‘러너스 월드(Runners World)’로부터 별 5개 등급을 받으며 미국 6대 스포츠화로 선정됐다. 프로스펙스는 나이키, 아디다스에 밀리지 않았고 교복 자율화에 힘입어 학생들에게도 인기였다.

 

양정모 회장은 1984년 서울 용산에 지하 4층, 지상 28층 규모의 국제센터빌딩을 완공했다. 이 건물을 국제그룹 사옥으로 단독 사용하며 그룹의 성장세를 과시했다. 국제그룹은 그해 연간 매출액 2조 원, 수출액은 9억 달러를 기록하며 재계 7위를 차지했다. 계열사만 21개에 달했다.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로 과거 이 자리에는 국제그룹 사옥인 국제센터빌딩이 있었다. 사진=고성준 기자


#“자고 일어나니 기업이 해체되어 있었습니더”

 

“국제그룹의 부실한 재무구조 때문에 더 이상의 금융지원은 어렵다. 부실기업으로 판명돼 그룹 전체를 정리하기로 했다.”​ 1985년 2월 국제그룹의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은 이런 발표를 냈다. 자체 브랜드 개발 실패, 용산 사옥 신축으로 인한 자금난, 건설업 적자 등으로 부채가 자본금의 9배가 넘는 방만한 경영을 했다는 게 국제그룹 해체의 이유였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당시 양정모 회장이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서 해체됐다고 평가한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숨진 희생자 유족을 지원하고자 1983년 12월 일해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일해재단 운영비를 모금하기 위해 대기업들을 불러 600억 원을 받아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51억 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45억 원을 헌납한 데 비해 양정모 회장은 5억 원만 헌금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미움을 샀다는 게 세평이다. 

 

양정모 회장은 ​1984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이 300억 원을 목표로 모금한 새마음심장재단 성금과 새마을성금도 3억 원만 납부했다. 11월에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전화를 받고서야 10억 원을 어음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이렇게 타 기업들에 비해 정치자금을 적게 제공한 국제그룹은 전두환 정권에 미움을 사게 됐다고 알려졌다.

 

1985년 2월 총선이 국제그룹에게는 결정타였다. 부산지역 총선 승리를 위해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 유세를 할 정도로 관심이 많아 부산 기업인인 양정모 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교롭게도 유세 시기가 양 회장의 막내아들 49제와 겹쳤고, 양 회장은 아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유세 현장을 빠져나갔다. 

 

이후 신민당이 부산 의석을 모두 차지하자 대통령의 분노는 양정모 회장에게 향했다. 전 대통령은 제일은행에 국제그룹의 발행 어음을 모두 부도 처리하라고 지시했으며 국제그룹 해체가 신속하게 이뤄졌다. 총선 이후 9일 만의 일이었다.

 

#위헌 판결 받았으나 재기는…

 

국제그룹 계열사는 그보다 작은 회사들에 인수돼 뿔뿔이 흩어졌다. 한일합섬이 국제상사의 신발 부문 프로스펙스를 인수했고, 동국제강은 연합철강, 극동건설은 국제상사의 건설 부문과 증권사를 인수했다. 대통령에게 많은 정치자금을 건넨 한일합섬과 동국제강이 큰 혜택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양정모 회장은 국제그룹 해체 사실을 제일은행이 발표하기 30분 전에 알았다고 한다. 부인은 이 충격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얻었다. 당시 양 회장 부인은 녹내장 수술 때문에 미국 병원을 예약했으나 전두환 대통령의 출국금지 명령으로 수술을 받지 못했다.

 

양정모 전 회장은 1987년 ‘국제그룹복권추진위원회’를 세워 국제그룹 해체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소송을 벌였고, 1993년 위헌 판결을 받아 부실기업이라는 불명예를 씻었다. 1994년에는 국제상사를 돌려받고자 ​한일합섬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이 소송은 1996년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양 전 회장은 1998년 부산도시가스 사외이사를 지내며 부산에 거주하다가 2009년 사망했다. 국제그룹 재건은 이뤄지지 못했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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