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한 번 드라마를 시작하면 어지간하면 마지막 화까지 보는 버릇이 있다. 1, 2화에서 아니다 싶으면 거르는데, 그 허들을 넘길 정도면 어느 정도 재미가 있다는 거고 그렇게 보다 보면 어쩐지 마지막까지 봐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기는 거다. 그래서 중반 이후부터는 엄청 씹고 욕하면서 오기로 보는 드라마도 많았다. 나한테는 ‘파리의 연인’이 그랬다.
2004년 방영한 ‘파리의 연인’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대사와 함께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한, 김은숙 작가의 신화를 시작한 드라마다. 사실 ‘파리의 연인’을 비롯해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 ‘도깨비’ 같은 김은숙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정말 빤하고 노골적이고 유치하다. 부와 명예를 지닌 남자와 평균에도 한참 못 미치는 가난한 여자가 운명처럼 만나 주변의 험난한 방해를 겪고 결국 사랑을 이뤄낸다.
그 빤하고 노골적이고 유치한 이야기를 김은숙은 교묘하게 잘 요리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곤 했다. ‘파리의 연인’의 강태영(김정은)과 한기주(박신양)를 보라. 파리에서 가난한 유학생 신분이던 태영이 우연히 GD자동차 사장인 기주의 집에 가정부로 일하게 되고, 또 우연히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으며 서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가 또 여차저차 일로 얽히다 급격히 사랑에 빠진다. 아무리 운명적인 끌림이라 우긴다 해도 맥락이 참, 없다.
그런데 참 요상하게도 그 맥락 없는 사랑 이야기에 우리는 훅 빠져든다. 그도 그럴 것이, 김은숙의 드라마들은 드라마 주 시청자인 여자들에게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가 세상 다시없을 공주이자 황홀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는 느낌을 선사한다. 남자 시청자에게는 부자이고 힘이 있는 데다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차가운 도시 남자가 되는 대리만족을 선사하고. 현실에서 내 힘으로 잘 먹고 잘 사는 독립적인 여자일지라도 그 마음 한구석에 숨겨져 있는 작은 판타지, 그러니까 모든 걸 갖춘 왕자 같은 남자가 “애기야, 가자!”라고 말하며 자신의 팔목을 잡아끌고 지루한 현실에서 탈출시켜 주길 바라는 판타지와 욕망을 정확히 겨냥해 화살을 날리는 것이다. 내 심장이 쇠로 만든 것도 아니고 온전할 리가 있나.
그렇다고 해도 ‘파리의 연인’을 끝까지 보는 건 참 힘든 일이긴 하다. 대책 없는 여주인공 태영이 제일 문제였다. 개인적으로 괴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형 여주인공을 제일 싫어하는데, 태영은 거기에 오지랖까지 겸비했다. 영화감독이던 아버지의 꿈을 안고 영화를 공부하러 파리에 갔다는데, 당최 거기서 뭘 공부하겠다는 목표가 없다.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은 최고의 액션배우를 꿈꾸는 스턴트우먼이었고, ‘상속자들’의 차은상과 ‘도깨비’의 지은탁은 적어도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열심히 공부라도 했다. 그런데 ‘파리의 연인’의 태영은? 가정부 및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지만 어학원에서 떠듬떠듬 초급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을 뿐 무엇을 위해 파리에 기를 쓰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인물이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더 한심하다. 기주의 마음을 외면하거나 기주에게 설레거나 기주 때문에 울고 소리 지르거나 기주의 마음을 시험해 보고자 수영장에 빠지는(!) 등의 행동 외에 뭔가 주체적인 모습을 못 봤다. 태영아, 너 대체 왜 파리에 목숨 건 거니?
여기에 답답함을 더하는 건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기주의 조카 윤수혁(이동건)의 끝을 모르는 집착 행위다. 파리에서부터 태영이 반한 건 기주였다. 수혁과 그럴 듯한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수혁에게 오해할 만한 여지를 준 것도 아닌데도 수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사랑만 밀어붙인다. 그때도 폭력적이라 느껴졌는데 2020년에 다시 보니 더 지치고 이해가지 않는다.
태영에게 “(자신의 가슴에 태영의 손을 갖다 대며) 이 안에 너 있다”라고 고백할 때는 손가락 발가락이 다 사라지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떨림이 있었는데, 후반부에 자신이 기주의 조카가 아니라 이부동생이라는 걸 알고 ‘흑화’되면서부터는 도무지 ‘쉴드’를 칠 수가 없다. “어떻게든 나 너 가질 거야!”라고 태영에게 집착을 보이며 기주를 궁지로 몰아넣을 땐 언제고, 막상 둘이 헤어진다니 후회는 왜 또 하며, 갑자기 교통사고 이후에 기억상실인 척은 왜 하는 거냐고?
이해되지 않는 건 이 외에도 많다. 기주의 누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생모였던 한기혜(정애리)의 비밀은 기주의 예비 약혼녀 문윤아(오주은)네 가족과 오랫동안 기혜를 짝사랑했던 GD자동차 최원재 이사(박영지)도 알던 사실인데, 33년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게 이해되지 않는다. 설령 밝혀지더라도 망신당하는 거 외에 뭐가 있다는 건지. 나중엔 태영과 수혁, 그리고 기주까지 다 알게 되잖아.
삼촌과 달리 재벌가의 외손자일 뿐이고(!) 엄마의 애정을 못 받았다는 이유로 사춘기 소년처럼 굴었던 수혁의 성장 배경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다. 아무리 엄마가 신경을 안 쓰고 재벌가 친손자가 아니어도 그렇지 저렇게 한량이 될 수 있나? 게다가 수혁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정략 결혼한 사이라던데, 그럼 아버지 쪽 집안도 만만한 집안은 아니었을 텐데 왜 없는 사람 취급되는 거지?
물론 제일 이해되지 않는 건 결말이다. 지금도 시청자들이 ‘지붕 뚫고 하이킥’과 함께 ‘최악의 황당 결말 드라마’로 꼽을 만큼 ‘파리의 연인’의 결말은 어마무시한 항의를 받았다. 물론 오해가 있긴 하다. ‘알고 보니 모두 다 소설 속 이야기더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확히는 세 쌍의 커플이 있고 그들 모두 해피엔딩을 이뤘거나 추후 이루어질 느낌이었으니까. 빤한 해피엔딩이 싫었던 제작진의 나름의 묘책이었겠지만 직접적이고 완벽한 해피엔딩을 바라던 대다수의 시청자들에게는 어림도 없었던 게지.
신데렐라 스토리에, 삼각-사각-오각관계에, 출생의 비밀에, 급작스러운 교통사고와 기억상실에, 다소 허망한 느낌을 주는 결말까지 ‘파리의 연인’을 씹을 요소는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다시 보면 또 보게 된다. 요상하다니까? 한 OTT서비스에 업로드 되어 있길래 무심코 1화를 보다가 욕을 하면서도 이틀 만에 끝을 보고 말았다고. 아직 이 드라마를 접하지 못한 2000년대 생이라면 한 번 도전해보자. 무엇보다 ‘항마력’을 높이고 싶다면 이 드라마만큼 좋은 선택이 없을 것.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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